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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여자

스틸 앨리스

by sweet little kitty

스틸 앨리스(Still Alice)


개봉 2015.04.29.

장르 드라마

감독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출연 줄리언 무어(앨리스), 알렉 볼드윈(존), 크리스틴 스튜어트(리디아)

원작 소설

러닝타임 101

수상내역 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7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여우주연상-드라마)


기억을 잃으면 자아도 사라지는 걸까


40대가 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언젠가 나도 병이 들고 결국 죽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20대에 이 영화를 봤다면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멀리서 내 미래를 보는 마음으로 <스틸 앨리스>를 보게 된다.


영화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컬럼비아대 언어학과 교수인 앨리스의 50번째 생일 파티 장면으로 시작한다. 앨리스는 자상한 남편과 변호사인 딸, 의사 아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LA에서 오지 못한 막내딸 리디아는 대학 진학을 거부했고, 그 사실이 앨리스의 마음 한구석을 계속 무겁게 한다.


https://youtu.be/cwcfrm34OWo?si=lDUj4bovZzsw5DST


완벽해 보이던 앨리스의 인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어느 날 중요한 강의를 하던 앨리스는 평소에 익숙했던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 순간적으로 멍해진다.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사소한 일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하고, 불안한 마음에 종합병원 신경과를 찾는다.


의사는 앨리스에게 복용 중인 약이 있는지, 최근 우울감을 느낀 적이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등 기억력과 관련된 병력을 세심하게 묻는다.



나이가 들어도 보존되어야 하는 기억들이 있다. 재인 기억, 시간 순서 기억, 그리고 실행 기억이다.
재인 기억은 전에 학습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 내는 능력이다. 시간 순서 기억은 ‘오늘 점심을 먹고, 마트에 다녀와, 친구를 만났다’와 같은 사건의 흐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이다. 실행 기억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손가락이 스스로 기억하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익힌 절차적 기억을 말한다. 이러한 기억에 손상이 생기면 우리는 치매를 의심하게 된다.


의사는 앨리스에게 세 가지 단어를 들려준다. '존 블랙, 워싱턴 42번가, 호보컨.' (우리나라에서는 ‘시계, 연필, 공’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이어 오늘 날짜, 현재 장소, 카드에 그려진 그림, 그리고 평범한 단어의 철자를 묻는다. 이는 인지 기능을 간단히 평가하는 MMSE 검사다. 5분 후, 의사는 다시 그 세 단어를 물어본다. 만약 기억이 나지 않으면 객관식 단서를 제시한다. 정상적인 재인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단서를 통해 정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앨리스는 끝내 대답하지 못한다.


1901년 11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정신병원에 51세 여성이 조현병 증세로 입원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우구스테 데터(Auguste Deter)였다. 40세 무렵부터 혼돈, 불면, 망상 증상을 보여 남편이 데려온 것이다. 그러나 데터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방금 먹은 점심 메뉴도 틀리게 말했다. 주치의와 간호사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 사람과 장소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1906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담당 의사였던 알츠하이머 박사(Alois Alzheimer, 1864–1915)는 당시 신경매독 환자의 뇌 조직 병리를 연구하던 학자였다. 그는 15년 동안 수많은 뇌 조직 슬라이드를 제작하며 조현병 환자의 뇌에서는 뚜렷한 이상을 찾지 못했지만, 데터의 뇌에서 특이한 변화를 발견했다.


좌) 알츠하이머 박사 우) 아우구스테 데터, 최초의 알츠하이머 병 환자


그러나 아우구스테의 뇌 조직은 눈에 띄게 수축되어 있었고, 현미경 관찰 결과 이상 단백질 덩어리가 발견되었다. 알츠하이머는 그녀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 다른 인지기능 저하 환자들의 뇌를 부검하며, 동일한 병리적 소견을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언뜻 보면 조현병 환자와 비슷했지만, 이들은 망상보다 기억력과 언어 기능의 저하가 먼저 나타났다. 그 질환이 바로 ‘알츠하이머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은 어떻게 다를까?
알츠하이머병은 치매의 한 형태다. 기억력, 언어능력, 공간지각능력 등 인지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일상생활과 대인관계에 지장을 주는 상태를 통틀어 ‘치매’라 부른다. 치매의 원인은 다양하다 — 뇌혈관 손상으로 인한 혈관성 치매, 파킨슨병에 의한 치매, 외상성 뇌손상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비정상 단백질이 축적되어 발생하는 치매가 바로 알츠하이머형 치매다.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뇌에 쌓여 뭉치면 시냅스가 손상되고, 원래 신경세포를 안정시키는 역할의 타우 단백질이 과활성화되며 연쇄적인 퇴행 반응이 일어난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알츠하이머병 환자도 급증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전 세계 환자 수는 약 5천만 명으로, 전체 치매의 60~70%를 차지한다. 남성보다 여성이 많으며, 대부분 65세 이후 발병하지만 약 10%는 30~60세 사이에도 나타난다. 앨리스와 아우구스테처럼 젊은 나이에 시작되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이 여기에 해당한다.


신경과 의사는 MRI에서 특이 소견이 없다고 설명하며 앨리스에게 아밀로이드 PET 스캔을 권한다. 이는 알츠하이머병이 의심될 때, 축적된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영상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한 검사다. 아직 증상이 초기이기에, 확진을 위해 검사를 권유한 것이다.


https://doi.org/10.2967/jnumed.121.263195


시간이 지나면서 앨리스는 언어 구사에도 어려움을 겪고, 매일 조깅하던 길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병세가 더 진행되자 집 안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막내딸 리디아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무대 뒤의 리디아를 처음 보는 배우로 착각한다. 공간과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알츠하이머병의 전형적인 중기 증상이다.


알츠하이머병에 잘 걸리는 사람


앨리스는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역시 생전에 치매 증세를 보였기 때문에 의사는 가족성 알츠하이머 검사를 권유한다. 가족성 알츠하이머는 전체 환자의 1% 미만을 차지하는 드문 유전성 질환이다. 영화에서는 ‘프리세날린 단백질’이라는 유전자가 언급된다. 검사 결과 큰딸 애나는 양성, 아들 찰리는 음성, 막내 리디아는 검사를 받지 않는다. 이 유전자는 양성이면 거의 100% 발현된다.


알츠하이머 박사가 관찰했던 아우구스테 역시 젊은 나이에 증상이 시작되었다. 그녀에게 가족력이 있었다면 앨리스처럼 ‘가족성 알츠하이머’였을 것이고, 아니라면 ‘산발성 조기 알츠하이머’에 해당했을 것이다.


우리 뇌에는 노폐물을 스스로 제거하는 청소 시스템이 있다. 바로 수면 중, 특히 깊은 NREM 3단계 수면에서 활성화되는 글림프 시스템(glymphatic system)이다. 이 시스템은 알츠하이머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을 주기적으로 제거한다. 수면이 부족하면 이 과정이 방해받고, 장기적으로 7시간 이하의 수면을 지속하는 사람은 알츠하이머 위험이 높아진다. 잠을 줄이고 공부나 일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불편한 진실이다.


병이 진행될수록 앨리스는 단순한 기억 상실을 넘어 감정 조절이 무너지고, 우울감과 분노를 반복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잃는 일이다. 상실은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깊은 수치심을 자극한다. 결국 그녀의 불안은 분노로 변하고, 가족과의 관계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가족 모두가 앨리스를 안타까워하지만, 병이 깊어질수록 그들은 서서히 그녀를 가족사에서 배제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앨리스가 가장 염려하던 막내 리디아와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리디아는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때로는 예전처럼 다투기도 한다. 완벽한 교수이자 엄마로 살던 앨리스는 점점 딸보다 더 어린아이 같은 존재로 변해간다. 어느 날 앨리스가 리디아의 일기를 몰래 본 사실이 들통나고 딸과 크게 다투지만, 다음 날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잊은 채 앨리스가 먼저 사과한다. 리디아는 달라진 엄마를 보며 울면서 안아준다. 알츠하이머는 앨리스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소중한 관계를 되돌려 놓는다.


알츠하이머의 치료


기억에 중요한 신경전달물질은 아세틸콜린이다. 이 물질은 시냅스에서 신호를 전달하다 효소에 의해 분해된다. 알츠하이머에서는 이 작용이 줄어들기 때문에, 약물은 아세틸콜린이 시냅스에 오래 남게 해 인지 기능을 보조한다.


1986년 처음 임상시험이 시작된 타크린은 1993년 FDA 승인을 받았고, 이후 도네페질·리바스티그민·갈란타민 같은 약물이 개발됐다. 또 다른 약물인 메만틴은 NMDA 수용체를 차단해 신경세포 손상을 줄인다. 최근에는 병의 근본 원인에 접근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2021년 미국에서 승인된 아두카누(Aducanumab) 은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을 직접 제거하는 항체 치료제다. 2024년 5월 한국에서도 레카네맙(Lecanemab) 이 ‘레켐비’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지만, 고가의 비용과 뇌부종·미세출혈 등의 부작용이 문제로 지적된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 결국 ‘자아’는 서서히 사라진다. 가족조차 그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 영화에서도 남편과 큰딸, 아들은 점점 앨리스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리디아는 커리어를 중단하고 엄마 곁으로 돌아온다.


치매 간병은 단순한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정서적 생존이 걸린 일이다. 부모나 배우자가 점점 ‘아이’로 퇴행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은 우울과 상실감을 동시에 경험한다.
일본 도쿄 외곽의 마치다 시에는 ‘D(치매) 카페’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스타벅스에서 매달 한 번,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치매 환자와 가족이 일반 손님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치매 환자와 가족이 눈치 보지 않고 사회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 시간이다.



자신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


"나는 나 자신을 잃어 간다”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병 증상이 시작된 앨리스와 아우구스테의 공통된 대사였다.

기억을 잃는 것은 돈, 명예, 지위, 사랑, 가족을 넘어서 모든 것을 잃는 일이기도 하다. 알츠하이머 병은 도대체 왜 기억을 앗아가는 걸까? 진정으로 잊고 싶은 참혹한 기억은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평생 기억이 남는데, 결코 잃고 싶지 않은 빛나는 순간들, 내가 이루어 온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니 현실이 너무 가혹하기만 하다.


정한아 작가의 소설 <3월의 마치>에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배우 이마치가 가상현실에서 치료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놀라지만 곧 익숙해지며 자신의 과거를 꿈꾸듯 학습하고, 현실로 돌아와 몇 달간은 기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어느 날 가상현실 속 AI 노아는 치료를 그만 받으라고 말한다. ‘알츠하이머는 인생의 실패와 성공 같은 기억을 모두 놓아주라는 신호’라면서 말이다.


나 역시 알츠하이머에 걸려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슬프고 비참해서 견딜 수 없는 병이었다. 영화는 LA에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돌아온 막내 리디아가 앨리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리디아는 책의 뒷부분을 끝까지 읽어주고 얘기가 마음에 드는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물어본다. 아이 같은 표정으로 힘겹게 '사랑'이라고 입을 떼는 앨리스를 보면 눈물이 흐른다. 오래전 앨리스도 딸을 키우면서 이렇게 책을 읽어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을 이제는 딸이 엄마에게 해 주는 조용한 풍경이다. 앨리스의 알츠하이머 병세는 중기 이후로 접어들었지만 영화 제목처럼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Still Alice)다.


이 영화의 감독은 두 명이다.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루게릭 병을 앓고 있었다. 글랫저는 이 시기 이미 거의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아이패드에 음성 합성기를 연결해 스태프와 소통했고 현장 연출은 웨스트모어랜드가 대신 맡았다.


앨리스 역을 맡았던 줄리언 무어가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은 지 한 달 후, 글랫저 감독은 세상을 떠났다. 루게릭 병은 기억을 잃지는 않지만, 운동신경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며 결국에는 호흡조차 할 수 없게 되는 병이다. 어쩌면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의지’를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휠체어에 앉은 리처드 글랫저 감독, 그의 동성 배우자이자 창작 파트너, 스틸 앨리스의 공동감독인 워시 웨스트모어랜드가 배우들과 함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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