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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남자

메멘토의 레너드와 헨리 몰레이슨

by sweet little kitty

메멘토(Memento)


개봉 2001.08.25.

장르 범죄

감독/각본 크리스토퍼 놀런

출연 가이 피어스(레너드), 캐리앤 모스(나탈리), 조 판톨리아노(테디)

러닝타임 113분

수상내역 LA 비평가 현회상/시카고 비평가 협회상 각본상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모르잖아


“형, 나 지난주 심리학 강의 시간에 순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 대해서 배웠어. 방금 전까지 대화했던 사람도 금방 잊어버리고 기억을 못 한대.”

“그래? 그러면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설 한 번 써 볼래? 재미있겠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동생 조나단과 LA로 가는 차 안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조나단은 두 달 만에 초고를 써서 형에게 보냈고, 크리스토퍼 감독은 각본을 완성해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조나단은 초고를 완성해 에스콰이어 잡지에 <메멘토 모리>라는 단편 소설을 기고했다. 천재적 영감을 지닌 형제는 이렇게 영화 메멘토를 탄생시켰다.


좌) 기억상실증을 앓는 레너드 우) 레너드를 남자친구의 복수에 이용하는 나탈리


자신이 레너드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테디는 첫 장면에서 레너드에게 살해당한다. 시간 순으로 보면 이 장면이 마지막 사건이다. 테디는 “너는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아”라며 레너드를 조롱한다. 레너드는 자신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왔으며 사고 전의 일은 분명히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테디는 ‘그것은 과거의 너였던 것’이고, 너는 지금의 너를 모른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과거에 차 안에서 같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한 번 더 나온다. 그러나 레너드는 테디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기록한다.



메멘토는 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뒤 순행성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 을 앓는 레너드가 아내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순행성’이라는 용어는 조금 생소한데, 특정 시점 이후로 새로운 기억이 생성되지 못한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즉, 기억의 등록이나 저장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경우다. 반대로 역행성 기억상실증(retrograde amnesia) 은 사고 이전의 기억이 사라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 저장된 기억을 회상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레너드는 새로운 기억을 몇 분 이상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폴라로이드 사진, 메모, 문신 등을 사용해 정보를 기록한다. 시간을 거슬러 진행되는 컬러 장면은 현재 레너드의 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테디를 죽였는데 왜 죽였는지, 테디는 누구인지 기억이 없으니 시간을 거슬러서 추적하는 셈이다. 반면 흑백 장면은 정방향의 시간 순서대로 진행된다. 영화는 두 시간 트랙의 중간 지점에서 끝나게 된다. 컬러가 9월부터 시작이고 흑백이 5월부터 시작이라면 7월에 끝나는 것이다. 난해한 영화다.


기억하지 못해 영원히 기억된 인물, H.M.


놀란 감독의 동생 조나단이 수업시간에 공부한 인물은 아마도 헨리 몰레이슨(Henry Molaison, 1926-2008)일 것이다. 생전에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H.M.이라고 불렸던 헨리 몰레이슨은 9세 경 자전거를 타다가 머리를 다쳤고, 이후 간질 발작(뇌전증)으로 평생 고생한다. 16세 경부터는 발작이 조절되지 않고 점점 심해져 27세 되던 해에 뇌수술을 받았다. 신경외과 의사 윌리엄 스코빌은 간질파가 측두엽에서 시작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1953년 H.M.에게 측두엽 제거술을 시행했다. 측두엽은 관자놀이 안쪽 뇌부위로 해마와 편도체 등이 있고 내측은 기억, 감정, 외측은 청각과 언어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측두엽의 정확한 기능을 알지 못했다.


좌) 젊은 시절의 헨리 몰레이슨 우) 60세의 헨리 몰레이슨

수술로 측두엽이 제거된 후 H.M.은 뇌전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30초에서 수 분이 지나면 자신이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방금 전까지 대화하던 의사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인류는 그제야 기억을 만들어주는 곳이 측두엽의 해마 부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아란치(Giulio Cesare Aranzio, Arantius, 1529–1589)는 뇌의 빈 공간인 측뇌실 바닥에 돌출된 곡선 모양의 구조를 발견했다. 그 모양이 바다생물 해마와 닮았기에 해마(hippocampus)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마의 구조는 일찌감치 발견되었지만 기능은 몰랐다. H.M.은 측두엽 제거 수술을 통해 기억 연구에 큰 공헌을 했지만, 삶이 완전히 바뀌었기에 비극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과 사건을 기억하지 못해 다른 세상에 사는 듯했지만 지적인 능력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고, 연구자들은 H.M.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좌) 측두엽의 위치 우) 해마의 구조


H.M.과 레너드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도 있다. H.M.은 수술로 측두엽을 제거했지만 레너드는 물리적 뇌손상을 입었다. 사고로 뇌를 다친 사람치고는 운동이나 인지 능력이 정상인데 기억에만 심각한 손상이 있다.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영화적 허구에 가깝다. 수술로 측두엽만 제거한 H.M.은 길 찾기를 어려워하는 등 공간 인지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레너드는 공간 인지나 길 찾기에 문제가 없어 보이고, 계획과 원칙을 세우는 등 인지 능력이 탁월하다.


H.M.은 자신이 단기기억 상실 환자라는 것을 처음에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천 번 넘게 들은 뒤 스스로 메모해 지갑에 넣고 다녔고, 혼란과 우울감을 느꼈다. 반면 레너드는 자신이 기억상실이라는 점을 매순간 인지하고 있다. 남을 되도록 믿지 않으려 하고, 몸에는 문신을 새겨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H.M.은 레너드와 달리 역행성 기억상실도 나타났다. 27세에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3년 전까지의 기억, 길게는 11년 전 기억의 일부가 손상된 것이다. 반면 어린 시절, 특히 16세 이전의 기억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수술 시점으로부터 멀수록 해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에 기억이 존재한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반면 레너드는 자신이 순행성 기억상실만 있고 사고 전의 일은 모두 기억한다고 말한다.




심인성 기억상실이라는 궤변


레너드는 새미라는 인물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자신을 보험회사의 조사원으로 기억한다. 흑백장면에서 주로 등장하는 새미는 사실 레너드의 과거였다.


레너드의 기억과는 달리 그의 아내는 강도 사건으로 죽지 않았다. 사건 후 레너드는 기억 상실 때문에 일상이 파괴되고 생계가 어려워진다. 아내는 보험회사에 보험금 지급을 신청했지만, 회사는 레너드의 기억 상실은 심인성이라며 보험금을 지급 거절한다. 몸은 기억할 수 있는데 마음이 거부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새미의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 근거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감전 테스트다. 보험회사와 병원은 새미가 ‘신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한다며 쇠로 된 블록을 여러 개 놓고 그중 한 개에 전류가 흐르게 한다. 전류가 흐르는 블록에 한 번 손을 데이고도, 새미는 계속 그 블록을 집어 감전된다. 보험회사에서는 이 결과가 순행성 기억상실증과 맞지 않는다며 새미가 심인성 기억상실증이라고 결론 내린다.


20세기 초, 스위스의 신경과 의사 에두아르 클레파레드(Édouard Claparède, 1873-1940)는 뇌손상으로 인한 순행성 기억상실 환자를 상대로 비슷한 실험을 했다. 이 환자는 몇 분만 지나면 방금 대화하던 주치의를 기억하지 못해 매일 처음 만난 사이처럼 인사를 나눴다. 어느 날 클레파레드가 압정을 품은 손으로 악수를 하자, 환자는 통증에 깜짝 놀라 손을 빼냈다. 다음 날 클레파레드가 다시 와서 그녀에게 인사하자 환자는 의사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악수는 완강히 거부했다. 압정에 찔렸던 사실을 기억해서가 아니라,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두아르 클레파레드,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신경의학자


전자를 인지 기억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서 기억이다. 정서 기억은 해마가 아니라 편도체를 통해 형성되는데,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본능적으로 기억해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하기 위한 암묵 기억이다. 인지 기억과는 달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억이다. 뇌손상이 없는 정상인에게는 인지 기억과 정서 기억이 동시에 작동하지만, 순행성 기억상실 환자에게는 정서 기억만 작동한 것이다.


클레파레드의 실험에 따르면 새미는 감전된 블록에 손대기를 꺼렸어야 한다. 그런데 새미는 몇 달을 반복해도 감전된 블록을 집었다. 레너드의 얼굴을 한 보험조사원은 '연구에 따르면 순행성 기억상실 환자도 학습하면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새미는 그러지 못했다'라고 한다. 아마 H.M.이 수행했던 운동학습을 말한 것 같다.


연구자들은 H.M.에게 거울에 비친 어려운 도형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게 했다. 정교하게 별모양을 그려야 했기에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류가 많았지만 3일간 반복한 결과 H.M은 제대로 도형을 그려냈다. 물론 그리기 연습을 한 과정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H.M은 사고 후 탁구를 열심히 쳤는데, 치면 칠수록 실력이 늘었지만 그저 본인이 타고난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해마가 손상된 후에도 신체가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은 운동 학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운동 학습은 소뇌와 기저핵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해마의 손상과는 무관했던 것이다.


그런데 H.M이 도형 그리기나 탁구를 연습하여 완성하는 것과, 새미가 감전된 블록을 피하는 것은 둘 다 암묵 기억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절차 기억으로 훈련에 가깝지만, 후자는 정서 기억과 운동 기억이 함께 작용하는 고전적 조건화이기 때문이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가 나면 고기를 먹었던 기억 때문에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렸던 것처럼, 특정 모양의 쇠공과 감전의 불쾌한 느낌이 합쳐져 손대기를 꺼리게 되는 것이다. 클레파레드의 환자가 악수를 꺼렸던 것도 마찬가지였겠다.


보험회사가 주장한 심인성(해리성) 기억상실은 특정 사고 후에 역행성 기억상실이 생기는 것이다. 주로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데, 주인공이 교통사고나 정서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 과거의 사람이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만약 새미처럼 생존에 필요한 정서 기억까지 손상되었다면 심인성 기억 상실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뇌손상일 수 있다. 알면서도 집었다면 심인성 기억상실이 아니라 기억상실인 척하는 사기행위였겠다. 어쨌든 보험회사는 궤변을 늘어놓고 그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꼼수를 쓴 것뿐이다.


보험금을 떠나 심리적 원인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내는 보험회사에게 보라는 듯 레너드에게 당뇨 주사를 놓아 달라고 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정말 신체가 기억할 수 있다면 아내를 죽게 놔두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겠다. 방금 전 주사를 놓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레너드 때문에 아내는 저혈당 쇼크로 사망한다.


기억은 기록일까 해석일까


관객은 기억 상실 때문에 호텔 방값을 여러 번 내고, 나탈리가 방금 전 침을 뱉은 잔에 맥주를 따라 주어도 그냥 마시는 레너드를 보고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복수는 이미 끝났다는 테디의 말을 무시하고 아내의 복수를 위한 살인을 반복하는 레너드를 보면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레너드가 앓았던 기억 상실은 어쩌면 두 종류일 수도 있다. 강도 사건 때 생긴 뇌손상으로 순행성 기억상실이 생겼고, 자신의 행동으로 아내가 죽은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역행성 기억상실과 기억 왜곡(심인성 기억상실)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심리적 원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시점부터 새로운 심리적 기억상실이 생겼다는 생각을 하면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기억은 기록일까, 해석일까?

엔딩 장면에서 레너드는 눈을 감아도 바깥세상이 존재하듯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보는 세상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입장에서 레너드의 말은 자신의 기억 왜곡을 정당화하는 궤변일 뿐이다. 이 영화가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한 이유는 모두가 빌런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기 기억 상실을 앓는 레너드를 이용하려는 테디와 나탈리, 호텔 직원이 빌런 같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며 살아가는 레너드 자신이 가장 빌런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면서도 진실을 왜곡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기 기억의 원리를 밝혀내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Eric R. Kandel, 1929- )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태인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그는 9세로 학살의 직접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나치의 만행과 하루 아침에 등을 돌리는 이웃을 보고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잔혹해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빨리 잊는지 깨달았다. 인간의 기억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던 캔델은 장기 기억이 장기강화(Long-Term Potentiation)라는 시냅스 구조변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지 못해 끊임없이 현재를 되풀이한다. 사진과 문신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기억만 남기며 진실을 왜곡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잊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뇌의 시냅스가 만들어내는 생물학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도덕과 정체성을 지탱하는 힘이다. 과거를 잊은 개인은 방향을 잃고, 역사를 잊은 인류는 같은 비극을 반복한다. 기억은 인간다움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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