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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 모성과 천성사이

케빈에 대하여

by sweet little kitty

네가 태어나기 전에 행복했다


세상이 온통 붉은빛이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토마토 축제의 붉은색, 에바의 차와 집에 뿌려진 붉은 물감, 그러나 붉은색은 무엇보다 희생자의 피였다. 붉은색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폭력의 색이다.


에바는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모험가였다. 그러나 한껏 들뜬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처음 만난 남자와 아이를 가지게 되고, 젊은 모험가는 계획에 없던 결혼과 육아에도 몸담게 된다. 출산의 고통은 참혹했어도 아기를 안아보는 순간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엄마인 줄 알았는데, 에바는 지옥에 떨어진 표정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아이라도 순하면 좋으련만, 케빈은 에바가 여태 들어본 적 없는 주파수의 울음으로 에바를 괴롭힌다. 어떻게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에바는 공사장 한복판으로 간다. 아이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지 않기 위해서 간 것이다.



너무 울어서 병원에 오는 아이들이 있다. 보채고 우는 증상은 장이 말려들어가는 장중첩증의 증상일 수 있지만, 생후 6개월 이하에서는 흔하지 않다. DPT 접종을 맞은 후 심하게 보챌 수 있어 접종 병력을 물어보기도 한다. 대개는 응급실에 도착할 무렵 울음이 진정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양육자는 울음의 톤이나 패턴에서 배고픔인지, 졸음인지, 지루함인지 알아채게 된다. 아이는 처음에는 짜증스럽게 울지만, 배고프면 먹여주고 기저귀가 젖으면 갈아주는 일관된 보살핌을 받다 보면 엄마를 부르는 울음을 익혀나간다. 양육자를 신뢰하고 세상을 신뢰하게 되는 첫걸음이다. 그래서 어떤 형태든 아이의 울음은 의사소통인 경우가 많다. 그에 반해 케빈의 울음은 엄마를 부르는 중화된 울음이 아니었다. 하늘에 닿을 듯 찢어지는 고음을 오가며 분노를 토해내는 소리였다.


기질이 예민하거나 신경발달장애, 자폐스펙트럼이나 ADHD 등 신경발달장애가 있는 아동은 과도하게 울 수 있다. 감각처리, 자율신경계, 조절능력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아이의 울음은 부모에게 죄책감과 무력함을 안겨준다. 엄마는 아이가 미워질 수밖에 없다.



뱉는 행위와 유분증에서 활쏘기까지, 공격성의 총동원


케빈은 입에서 무언가를 뱉어내곤 했다. 자기 손톱을 물어뜯은 후 하나씩 뱉어 가지런히 놓는 장면은 섬뜩하다. 어릴 때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도 엄마가 보는 앞에서 뱉거나 엎어 놓는다. 당신이 준 것을 내 안으로 소화시키지 않겠다는, 돌봄에 대한 거부처럼 느껴진다.


케빈은 6세까지 기저귀에 대변을 보았다. 변기 사용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공격성의 표현이었다. 대변을 가릴 나이가 지났는데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를 유분증이라고 하지만, 케빈의 배변은 발달 단계와는 무관한 의도적 행동처럼 묘사된다. 항문기 공격성은 구강기 공격성과는 다르게 목표물이 반드시 있다. 케빈의 타깃은 늘 엄마였다.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그 자리에서 배변을 하는 케빈을 본 에바는 아이를 내동댕이 치고, 케빈의 팔이 부러진다. 하지만 케빈은 깁스를 해 준 병원 의사에게도, 아버지 프랭클린에게도 그냥 사고였던 것처럼 말한다. 엄마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다시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빈은 더 이상 기저귀에 배변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읽어주는 로빈 후드 동화를 좋아했던 케빈에게 아버지 프랭클린은 화살을 선물한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헌신하는 법이 좀처럼 없던 케빈은 양궁에 몰두한다. 방법만 바뀌었을 뿐, 목표물을 향한 공격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유분증과 닮아 있다.


여동생 실리아가 태어났다. 케빈과 달리 애교 많은 여동생을 케빈이 좋아할 리 없다. 어느 날 실리아가 가장 아끼는 햄스터가 사라지고, 에바는 하수구에서 햄스터의 시체를 발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바가 사용한 하수구 세척제가 실리아의 눈에 들어가 의안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에바가 없고 케빈이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실리아의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케빈은 동생의 눈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며 엄마를 비웃듯 동그란 과일 리치를 씹어 먹는다. 참혹한 사고 앞에서 태연한 점, 엄마를 조롱하는 눈빛, 자신을 의심하는 엄마에게 화를 내는 대신 여유롭게 말하는 태도에서 사이코패스의 특징적인 인격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열여섯 살 생일을 3일 앞두고, 케빈은 철자물쇠를 대량으로 구입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가 소설에 담겨 있다. 케빈은 교장 선생님 이름으로 학생과 교직원 9명을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하여 초대장을 보내고, 시상식을 준비한다. 케빈과는 어떠한 원한 관계도 아니었지만,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헌신하며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시간, 체육관에 모인 수상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화살을 맞게 된다. 경비원이 쉽게 열 수 없는 자전거 자물쇠는 체육관을 잠그기 위한 도구였다. 치밀하게 사건을 준비한 점, 활을 쏠 때 섬뜩한 응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점, 학살이 끝나고 미소를 띠며 자신에게 도취된 표정으로 당당하게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에서 사이코패스 검사 PCL-R의 항목 <범죄적 재능>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이코패스는 톱니바퀴가 맞물렸을 때 생겨난다


2005년 사이코패스의 뇌를 연구하는 뇌과학자 제임스 펠런(James H. Fallon, 1947–2023)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 대조군으로 준비한 자신의 뇌 MRI 스캔을 보고 당황하게 된다. 펠런은 충동 조절과 감정, 공포를 담당하는 전두엽과 편도체의 활성이 눈에 띄게 떨어져 있는, 범죄자들의 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펠런의 아버지 쪽 가계도를 조사해 보니 친족을 살해한 범죄자들이 있었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영국의 존 왕까지도 조상으로 추적할 수 있었다. 펠런의 할아버지와 형제들 역시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펠런은 이후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이코패스를 만드는 세 가지 요인으로 안와전두피질과 편도체를 포함한 뇌의 기능 저하, 모노아민 산화효소(MAO-A)의 유전자 변이, 그리고 어린 시절의 학대를 꼽았다. 모노아민이란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과 같은 각종 신경 작용을 전달하는 메신저들을 말하는데, MAO-A는 이를 적절한 타이밍에 수거하는 효소다. 네덜란드의 한 범죄자 집안을 조사해보니 MAO-A 효소를 거의 생산하지 않는 유전자 변이를 보였다. 이처럼 공격적인 행동과 연관되는 이유전자를 전사(warrior) 유전자라고 부른다.


펠런은 감정이 빈약하고 규칙을 잘 어기며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특성이 있었지만 반사회적 행동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교도소에 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로 부모님의 양육을 들었다. 펠런의 부모는 아들의 남다른 성향을 알아보고 부모와 사회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펠런은 사이코패스가 어느 집단에서든 2% 정도 존재하며 인류 역사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성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이제 맨주먹으로 영토 싸움을 하지 않지만, 수백 만년 동안 사냥과 영토 싸움을 통해 가족과 부족을 지켜 왔다. 여기에는 전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전사는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전쟁을 이끌 수 있어야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모해야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감정을 분리할 수 있어야 뛰어난 전사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야만적인 시대에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사이코패스가 진정한 지도자였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성공한 정치인들의 일부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다.


https://youtu.be/u2V0vOFexY4?si=dUpWK8rTNTeLog9R


영화에는 없지만 소설에는 에바 일가의 비밀이 숨어 있다. 에바의 부모는 튀르키예, 오스만 제국에 살던 아르메니아인이다. 20세기 초, 튀르키예인들은 소수민족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 학살이다. 에바의 할아버지는 총살당했고, 에바의 아버지는 강제수용소에서 태어났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 미국으로 흩어졌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날 아버지의 죽음 가운데 에바가 태어났다. 에바의 어머니는 딸의 탄생을 기뻐할 수 없었다. 에바가 케빈의 탄생을 기뻐하지 못했던 것처럼.


광장공포증 환자가 되어버린 어머니 때문에 에바는 밖으로 나가 어른이 할 일까지 처리해야 했다.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밖으로 내몰린 아이는 성추행도 당했다. 갇혀 지내는 것을 싫어하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에바는 사실 집 밖으로 나가야만 했던 아이였다.


사이코패스가 뛰어난 전쟁 지도자의 성향이라면, 끔찍하게 학살당했던 에바의 일가에 전사의 피가 흐르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방어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전사의 무기가 가족과 사회를 향했다는 점이다. 사이코패스의 뇌와 살인자의 족보를 지녔지만 부모와 건강한 애착을 통해 친사회적 사이코패스로 남은 제임스 펠런과의 차이다.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지만, 원래 제목은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번역 과정에서 잘렸지만 내가 가장 의미를 두고 싶은 단어는 talk다. 뇌 구조나 유전자 변이처럼 타고나는 것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양육과 학대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프랭클린의 지나치게 허용적 태도, 부부가 양육관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점, 에바 같은 잔인한 학살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없었던 점, 케빈이 어릴 때 정신과 의사나 심리 전문가를 만나지 못한 점이 특히 아쉽다.


제임스 펠런은 사이코패스가 만들어지는 요인을 의자의 세 다리에 비유했다. 만약 뇌의 구조적 문제와 전사 유전자 변이를 천성이라고 본다면, 모성과 천성의 톱니바퀴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성일까, 천성일까. 한쪽 톱니바퀴를 탓하기 전에 맞물리지 않을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참고한 책


1. 제임스 펠런 지음, 김미선 옮김.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더퀘스트, 2015.


2. 박문현, <사이코패스는 누구인가-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16.


<정신질환은 유전되는가> 편에서 제임스 펠런을 먼저 언급해 주신 @샤인젠틀리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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