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냐고요? 계획이랍니다. 코로나 베이비와 함께한 행복 찾기
남편이 말했다. 박들판 어때? 그 이름을 듣지 말아야 했다. 계획해 놓을 모든 것이 취소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코로나 시대 한가운데 낙담함 마음이 그 이름을 들어버렸다. 넷째? 해볼까? ‘박들판’이 이름이 너무 예쁘잖아? 그래 둘둘 애들 짝을 맞추지 뭐. 그 이름에 설득된 나와 남편은 넷째를 계획했다. 들판이는 계획된 순간부터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 코로나 시대 한가운데 있었다.
병원에서는 출산 할 산모와 보호자에게는 48시간이 유효한 PCR 검사 결과를 요구했다. 급하게 병원에 가더라도 신속 항원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인당 10만원. 6인 가정에게 20만원은 큰 돈이다. 아기가 스스로 나올 때를 기다리던 우리는 그 돈을 아껴 고기를 사 먹자며 이틀에 한 번씩 보건소를 찾아가 코를 찔렀다. 증상이 없어도 무료 PCR 검사를 해주던 때였다. 2021년 1월, 막 48시간이 지난 PCR 결과 하나와 다음 날 아침 도착할 PCR 검사 결과 사이 어느 밤 나는 마스크를 쓴 채 들판이를 만났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상황으로 힘들던 코로나 시대였다. 그 시간을 나는 세 아이를 돌보며 임산부로 지냈다. 모든 것이 멈춰졌고 학생들은 등교하지 못했다. 어린이집은 ‘긴급보육’이라는 이름으로 보낼 수 있었지만 나는 보낼 수 없었다. 집 밖을 나가면 코로나가 걸릴까 걱정도 컸고 출근하느라 아이들을 꼭 보내야 하는 집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방송과 사회 곳곳에서는 코로나19 종식과 감염 방지를 위해 서로 접촉을 줄여야 한다고 떠들며 네 명 이상 모여 밥도 먹지 못하게 하던 때였다. 힘들어도 전업주부인 내가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임신한 몸으로 7살, 5살 2살의 아이들을 돌보며 끼니를 해 먹이는 일은 고됐다. 언제까지 집에서만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하는지 불러온 배로 몸을 움직일 힘이 없는 날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집 원비는 모두 내고 있으면서도 전업주부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일은 눈치가 보였다. 모두의 마음에 날이 서 있고 힘든 시간을 이었다. 모두 자기의 몫을 참고 버티는 동안 나도 그 몫을 하고 있었다.
임신 중 산부인과에 가는 일도 어려웠다. 병원은 아이를 동반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어쩌다 어린이집에 가는 날이나 남편이 아이들을 볼 수 있는 주말에 혼자 병원에 갔다. 예약 시간은 의미 없이 대기 시간은 늘 길었다. 아이를 낳는 사람이 없기에 출산이 가능한 병원도 점점 사라지는지 병원은 늘 사람이 넘쳤다. 마스크를 쓴 채 사람이 가득한 병원에 다녀오면 긴장감으로 온 하루가 지나 있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걱정은 더했다. 전에는 진통이 오면 아이들과 병원에 가서 가족 분만실에서 함께 기다리다 출산했다. 이번에는 보호자 한 명만이 출산과 입원을 도울 수 있었다. 나는 네 번째 출산인 경산모인데 갑자기 진통이 온다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남편이 있더라도 남은 아이들 때문에 혼자 아이를 낳으러 가야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코로나 속 출산은 마음이 더 단단해야 했다.
일상을 잃고서야 당연한 소중함도 발견했다. 매일 밥과 간식을 주던 어린이집의 고마움, 늘 부대낄 수 있던 친구들과 선생님.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미루던 산책길이 생각났다. 고맙고 당연한 것들이 그리웠고 그것을 미루던 나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이제야 깨달았다.
연이어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일을 할 수 없는 게 늘 마음에 걸렸었다. 몇 년을 내 마음을 애달게 하던 경력 단절이 지독한 바이러스의 시대에 온전히 내 품에서 아이들을 챙기게 해 주었따. 하루아침에 등교도 등원도 못 하게 되는 상황에 당장 일을 가야 하는 엄마들은 아이를 맡길 곳을 찾으며 전전긍긍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집에 혼자 있는 아이 생각에 마음 고생을 하다 일을 관둔 여성들이 많았다. 일을 관둘 정도의 고민은 많은 수가 남편과 공정하게 나눠 가지지 못하고 엄마들이 감당하고 해결해야 했다.
외출 없는 수 많은 날을 집에서 보내도 형제 많은 집의 아이들은 심심한 줄 몰랐다 어쩌다 외출에도 항상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프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모든 일상이 감사함이었다.
그 사이 뱃속의 아이는 세상에 나올 만큼 자랐다. 스스로 나올 때를 기다리던 아이는 진통의 신호를 보냈다. 마침 주말이라 한 시간 거리의 시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집으로 와주셨고 나와 남편은 넷째를 임신하고 처음으로 단둘이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속 일상은 멈췄지만 아이들은 자랐다. 넷째 들판이는 걷기 시작하고 자기가 막내일 줄 알던 셋째도 들판이만은 다정하게 챙기는 오빠가 되었다. 유독 작고 가볍던 둘째도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동안 잘 먹고 잘 자서 한 뼘이나 컸다. 첫째 솔방울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나를 학부모로 만들었고 다행히도 전면 등교를 할 수 있는 1학년이 되었다. 이제 3살이 된 들판이는 언니 오빠들을 따라 크느라 못 하는 말이 없다. 온 가족은 그 모습에 몇 번씩은 더 웃는다. 들판이를 낳지 않았다면 없었을 웃음이다. 이제 몇 년간 필수품이던 마스크는 기억 멀리로 사라졌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이제 코로나와 함께 살아간다.
매일 매일 힘들다고 생각했던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보니 그 속에는 변화가 있었고 희망을 만났다. 이 기억이 옅어져 갈 때도 진짜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코로나 시대에 만난 우리 가족의 가장 큰 행복은 두 번의 여행과 바뀌어버린 우리 집 넷째 ‘들판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