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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여자 Feb 20. 2021

남편이 담배를 끊었다고 믿는다.

배우자의 참을 수 없는 거짓말 : 아내의 이야기

몇 달 전 기분 나쁜 꿈을 꿨다.

남편이 다시 담배를 피우는 꿈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오빠~ 담배 피우는 거 아니지?" 뜬금없이 남편에게 물었다. 화장실에서 크고 중요한 일을 보고 있던 남편은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 설마 아니겠지.' 마음을 진정시키던 찰나, 열린 드레스룸 문 사이로 남편이 어제 매고 갔던 크로스백이 눈이 들어왔다. '요즘 다시 큰 가방을 들고 다니네?'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가방을 열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안에는 작고 아담한 전자담배 기계와 전자담배 한 갑, 그리고 보조배터리가 들어있었다. 바람이라도 핀 남편의 핸드폰을 몰래 열어보는 것처럼 손이 벌벌벌 떨려왔다. 남편은 낌새가 이상했는지 평소보다 일찍 화장실에서 나왔고 내가 침대 위에 꺼내놓은 전자담배와 친구들을 바라봤다. 침묵이 흘렀다. 분해서 눈물이 났다. 담배를 몰래 다시 피우는 것도 괘씸했지만 거짓말은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속았다.

나름 예민 코라 흡연자 감별 능력이 있다 자부하고 살았는데 남편 놈은(미안하지만 이 표현을 써야겠어.) 아마도 인터넷에 <담배 피우고 냄새 안나는 법>, <여자 친구에게 담배 안 들키기> 등의 검색어를 찾아봤음이 분명하다. 그와 첫 소개팅을 하고 몇 번의 만남을 이어갈 때까지 그가 흡연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PC 배경화면에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는데 어느 날 글들을 자세히 보다가 <건강관리 - 연타 금지>라고 적혀있는 걸 발견했다. 그가 담배를 피운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내 동공 지진을 목격하고 그는 예전에는 연초를 피웠으나 나를 만나고서는 전자담배로 갈아탔다고 했다. 예전에는 담배를 많이 피웠지만 요즘엔 많이 줄여서 나흘에 한 갑 정도밖에는 안 피운다고도 했다.


나는 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래, 담배는 기호식품이니까...” 하고 말을 흐렸다. 내뱉는 말과 달리 속으로는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줄여서 나흘에 한 갑.......? 예전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담배를 피운 거야? 전자담배도 담배잖아. 전자담배를 피운다고 달라지는 게 뭐람. 흡연가라는 걸 애초에 알았다면 오빠를 만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와 감정이 깊어졌던 시기였고 담배를 피우는 걸 알았다는 이유로 관계를 무를 순 없었다. 그는 원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고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 첫 담배를 사서 입에 물기까지

몇 달이 지났다. 그는 연애 초 그토록 숨겨왔던 흡연자의 행동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밖에서 식사를 할 때면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하고는 10분을 넘기고 돌아왔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를 일어날 때면 계산을 하고 먼저 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나오라 했고 식당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있는 시간들이 익숙해져 갔다. 어느새 나는 그의 흡연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촉이 오면 쌀쌀맞게 굴거나 말없이 삐지곤 했다. 한 번 싫어지니 모든 생각이 그쪽으로 집중됐다. 크게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그 무렵 그와 데이트 약속이 있던 어느 주말, 늦잠을 자느라 약속시간을 한참 넘겨버린 그가 집 근처로 오기로 한 날이었다. 잠깐 근처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오피스텔 건물 바로 앞에서 전자담배를 입에 물고 웹툰을 보며 낄낄대는 그를 발견했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시간보다 무려 5시간이나 지각을 한 주제에 저렇게나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니 도대체 내가 기다리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싶었다. 너무 화가 나서 온 몸의 분노 세포들이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여자 친구가 이렇게 담배 피우는 게 싫다는데 노력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한 고집하는 그는 그렇다고 한 번에 물러서는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하기 전까지 끊겠다. 지금은 강요하지 말라."라고 오히려 으름장을 놓았다.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그래, 계속 담배를 피우겠다고? 그럼 나도 핀다!" 오기로 난생 첫 담배를 샀다. 외근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휴게소였는데, 아는 담배가 말보로뿐이라 "말보로 주세요." 했더니, 직원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여긴 국산밖에 안 팔아요."라고 말했다. “그럼 아무거나 주세요...” 어떻게 피는지도 모르겠는 담배를 이름 모를 휴게소의 흡연구역에서 입에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이 너무 미웠다. 나를 이렇게까지 추락하게 만들다니 모두 그의 잘못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렇게 까지 격한 반응을 보였을까 싶다. 처음에는 그가 흡연을 하는 동안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싫었다. 그다음에는 건강도 망치고 돈도 낭비하는 그 행위 자체가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반대하는데 그 행위를 지속하는 그가 나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당시 그와 담배 말고도 연애 가치관에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모든 게 겹쳐지며 나는 슬프고 우울해했다. 관계가 지금처럼 안정화되기까지는 그도, 나도 많은 노력을 했으리라.





남편은 현재 금연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남편이 현재 금연 중이라 믿는다. "한 번 담배를 시작한 사람에게 금연은 없다. 절연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남편도 예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기호식품이 별게 있나. 좋은 기분이 드니 습관적 반복적으로 가까이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나 좋다고 하는 걸 못하게 하는 내 마음도 좋지만은 않다.


오랜 기간 흡연을 하셨던 아빠는 수년 전 대상포진과 폐렴이 겹쳐 입원을 하신 적이 있다.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아빠가 그 고비를 넘기고도 담배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오던 때가 생각난다. 아빠는 스트레스가 많을 때 차라리 담배를 한 대 피우는 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낫다고 얘기하셨다. 그러면서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일찍 배웠다며 후회의 감정을 내비치셨다. 그때도 참 많이 담배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남편이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한다. 남편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은 이기심에서다. 남편이 너무 오래 혼자살면 챙겨줄 사람이 없어 힘들테니 비슷하게 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다. 남편이 나보다 5살이 더 많으니 5살 더 젊게 살아주면 된다. 내가 5살 더 늙게 사는 방법도 있지만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 남편이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번만큼은 그의 금연 결심이 잘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건강한 나이 듦을 응원한다.


 



안녕하세요, 그여자입니다. ‘그남자’로 활동하는 남편과 연애와 결혼, 부부생활을 주제로 매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는 아내들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남편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 그남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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