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의 자수 Oct 22. 2023

내리 흐르는 사랑

초등학교 2학년 때, 시골학교에 다녔다. 초록의 물결이 넘실거렸던 산골짜기 시골 분교는 키가 작았고, 하늘은 더없이 드넓었다. 덕분에 나는 여백의 하늘을 공책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새까맣고 왜소했던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흘러내리는 바지를 부여잡으려 멜빵을 메고 학교에 갔다. 곧 폐교 직전인 시골 분교에는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들만 계셨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복도의 공기가 신선했다. 지금껏 맡았던 시골의 흔한 비누 향기가 아니었다.     

 '엇. 방금 지나간 저분은 누구지?'

엄마를 가르치셨다던 흰 머리카락이 수두룩한 선생님은 분명 아닌데....     

"자. 오늘부터 한 달간, 너희를 가르쳐줄 선생님이야."

당시의 청춘을 대표했을 구불거리는 파마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 하늘거리는 치맛자락. 시골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젊은 여자 선생님이 교단에 계셨다. 떠나는 선생님, 떠나는 학생만 있었던 작은 분교는 오랜만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날부터 나의 등교시간은 더 일찍 당겨졌다. 반장으로서 나의 임무는 한 달간 선생님을 최대한 잘 보필하는 것이었다. 말이 보필이지,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은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수줍게 피어올라 귀찮게 선생님을 따라다녔을 테다.

'우리 엄마 머리카락도 저렇게 구불거리는데... 우리 엄마도 저런 하늘거리는 치마가 참 잘 어울릴 텐데...'

사정상, 헤어져 지내야 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일렁였기에... 주야장천 선생님만 따라다녔던 것 같다. 갸륵한 순애보를 선생님께서 눈치채셨는지. 어느 날, 선생님께서 경운기 하나 겨우 다니던,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던 그 산골짜기 시골에서 나랑 친구 한 명을 데리고 도시 구경을 시켜주시겠단다. 광주! 라니!!!! 한 번도 못 가본 그곳에? 설레는 마음에 몇 날 며칠 잠을 못 잤다. 다 함께 떠나는 소풍이 아닌 셋이서 특별하게 떠나는 여행이라 흥분되는 마음은 더욱 감출 길이 없었다. 시외버스 계단을 오르며 행여나 넘어질까 손잡아 주시고, 행여나 멀미라도 할까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셨다. 드디어 광주에 도착. 백화점에 가서 돈가스를 사주시고 작은 양말을 한 켤레 사주셨다. 내 딴에는 최대한 예쁘게 꾸미려고 치마와 함께 타이즈도 신었는데 하필 발가락에 구멍이 났다. 신발을 어떻게 벗어야 하나, 창피함이 올라와 허연 버짐마저도 빨갛게 덮일 지경이었다. 허연 버짐이 핀 얼굴은 번쩍 빛나는 백화점 속 명품과는 참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 까마귀만큼 새까맣던 내가 백화점 속 샹들리에와는 참 거리가 멀었을 텐데… 선생님이 나를 그렇게 초대해주셨다.      

코흘리개 아홉 살 난 여자 아이 둘을 도시로 데려갔던 선생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골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인 도시를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교생실습 때에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만발하기에, 첫 제자에 대한 주체 못 할 사랑을 그렇게 분출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엄마 없이 시골에 갑자기 내려와 살았던 내가 안쓰러웠을까? ...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분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다. 차마 다 헤아릴 순 없어도 내 삶의 한구석에는 숨결처럼 남아있는 그분의 보살핌이 있다..... 외롭고 초라했던 나를 위로하셨던 그 마음, 그 사랑이... 문득 떠오른다.     

내가 지금 왜 이곳에 있는지, 내가 지금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한 해답일지도 모른다...     

그분의 사랑이 숨결처럼 내 삶에 남아 그 사랑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흘려보내는 것 같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아홉 살의 나에게 다가왔던 선생님처럼,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이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이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이 거리를 걷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함께 우산을 씌워줄 누군가가 필요하듯, 아이와 함께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함께 헤쳐나가고 손잡아주고 안아준다. 상처 난 마음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상처 난 과거를 벗어나 당당히 세상에 두 발로 설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이다.


"선생님... 아니었다면 저 죽었을지도 몰라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샘을 만나서 참 다행이에요. 나중에 커서 샘에게 꼭 은혜 갚을게요. 맛난 것도 사드릴게요."  

”아니야. 살다가 네가 여유가 될 때, 네 주변에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손 내밀어 주면 돼. 꼭 샘이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받았던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이 아이들도 언젠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 은혜를 갚겠다던 선생님의 연락처조차 몰라 미안해하는 마음이 아닌, 꼭 선생님이 아니어도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낸다면 그분의 뜻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나 또한 그 선생님을 찾아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처지지만.. (그래서 때론 그때의 다짐을 지키지 못해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뿐이지만... 인생 속에 너무나도 쉽게 약속을 하곤 했다.) 선생님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비록 선생님께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선생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제자들에게 흘려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교생실습 시절의 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꼭 안아주실 것이다. 

잘 컸다고,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고 꼭 안아주실 것만 같다. 

이전 09화 마음의 자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