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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Sep 08. 2023

씁쓰레한 요즘, 커피생각이 나




‘오늘 우리 집. 엄마, 아빠 없어. 학교 끝나고 콜?!’

수업 시간 어깨너머로 몰래 날아온 쪽지였다.

‘당연히 콜이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슬며시 친구에게 윙크를 날렸다.


그 시절, 우리는 빈집이 있으면 바로 우리들의 아지트로 삼았다. 너무 많이 모여도 안된다. 소리 소문 없이, 흔적도 없이 해치워야 하니까. 서너 명이 모이면 은밀하고도 음흉한 일들이 펼쳐졌다.


“오늘은 코~피!”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혀를 굴리는 모습이라니. 뇌꼴스레 혀를 굴린 게 아니니 눈감아 준다. 친구가 찬장에서 꺼내온 알루미늄 커피 통은 TV 광고에서 보던 노란 봉지의 커피와는 외관부터 다르다. 아프리카인지, 미쿡인지 모를 어딘가에서 아빠가 공수해 온 귀한 것이란다. 절대 누군가 손을 댔다는 티가 나면 안 되니, 아주 조금씩 맛을 보기로 했다.


“으음~~~”

모두들 게슴츠레한 눈을 흘기며 하나, 둘 다리를 꼬기 시작했다. 귀밑으로 똑떨어지는 머리. 단발 주제에, 넘길 머리카락도 없으면서 괜히 쓸어 넘겨 보았다.



그 시절, 우리들의 코스프레.

어른들 몰래 마시는 코피 한 잔에 어른 흉내란 흉내는 다 내고 싶었다. 어른들이 본다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커피 맛을 알아?” 잔소리를 한창 했겠지만. 인생의 쓴맛을 아직 모르던 그때엔 커피 맛을 알 리가 없었다. 한두 번 어른 흉내를 내고선 죄다 인상을 쓰며 싱크대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맛도 없는 커피를 어른인 척 마시기 시작하면 사춘기의 전조라더니, 딱 사춘기였던 우리는 그렇게 어른들 몰래 숨어서 하는 일들에 해방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이 담배를 몰래 펴보기 시작했듯 말이다. 남학생에 비하면 발칙하지 만 조금은 귀여운 반항이었으리라.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나. 갑자기 커피가 좋아지는 일이.”


「100 인생 그림책(하이케 팔러 글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 사계절 출판사)」에서는 18살에 갑자기 커피가 좋아진다고 한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참 늦게 커피 맛을 알게 된 것 같다. 남들 다 좋아하는 커피를 20대까지 마시지 않았다. 첫째를 임신한 29살에 느닷없이 말 그대로 커피가 땡겼다. 임신하면 안 먹던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더니 커피가 마시고 싶어질 줄이야. 대학원을 다니며 동기들과 마셨던 이디야 커피의 그 고소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남들은 임신하면 커피를 끊는다는데 임신해서 커피가 좋아지다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두 번의 임신, 출산, 모유 수유의 쳇바퀴 속에 고소한 커피 맛은 애써 보리차에 욱여넣었다.



두 아이를 낳고 몇 년이 지난 뒤, 중학교로 복직했다. 내 책상 뒤로는 낯섦도, 두려움도 이겨 낼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으니 바로 과학 선생님이 만들어준 더치커피 메이커였다. 재활용 플라스틱 병과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이 녀석이 어찌나 더치(Dutch)스럽게 추출해 주던지. 마음이 요동칠 때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커피 원액에 ‘이건 내 눈물이야’ 생각하며 혼자 신파극을 찍기도 했다(끝까지 간직하고 싶었는데 내가 학교를 옮김과 동시에 더치커피 메이커는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와서 깊은 애도를 표한다.)



지금 다니는 학교에는 교사를 위한 쉼의 공간이 있다. 북 카페를 연상시키는 그곳엔 우리 집에도 없는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이 있었으니... 매일 아침, “갈까요?”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부장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유독 커피 맛이 쓴 날도, 유독 커피 맛이 달아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유독 커피 맛이 쓴 날이면 옆방 선생님이 건넨 달짝지근한 쿠키에 기대어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요즘 같은 날들이라면 달콤하거나 혹은 짭짤한 커피보다 씀바귀 맛이 나는 쓰디쓴 커피가 무척이나 당긴다. 7월 18일.

서이초 막내 선생님이 떠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교권 침해 사안. 선생님들의 죽음.


마음이 무너지는 소식을 접할 때면, 도저히 쓴 커피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교직 인생의 쓴맛을, 아픈 맛을 너무나 많이 지켜본 요즘은 인생 최대의 씁쓸한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작게나마 고통에 함께 동참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마음의 아픔은 결국 몸의 이상으로 찾아왔다. 커피를 마시면 기침이 나오고, 가슴이 쓰라린 증상 때문에 더는 나 자신을 커피로 위로할 수 없게 되었다.


참 야속하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땅의 선생님들의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부드러운 휘핑크림이 곱게 올라간 커피를 선물한다면, 휘핑크림이 선사하는 부드러움과 달달함으로 선생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전국의 모든 선생님에게 사드 리고 싶은 심정이다.


서이초 선생님의 49재가 지났다.

아침마다 쓰디쓴 커피 한 잔에 기대어 하루를 시작하는 선생님들의 일상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기 기도해 본다.



#커피 #온기 #서이초 #학교상담 #교사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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