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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Dec 03. 2023

사춘기 딸의 쪽지 "집에 온 걸 환영해"

아이에게 받는 위로와 슬픔

2023년 4월, 새 학기의 분주함이 사라질 무렵이었다.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긴만큼 오랜만에 저녁 강의를 마치고 한 선생님과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

"엄마. 어디야? 언제 와?!"

중학생이 되었다고 전화 한 통 없던, 심지어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잘 받지 않던 첫째 딸의 전화였다. 분명, 오늘은 평상시보다 늦는다고 미리  이야기했는데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직 출발 전이라는 엄마의 대답에  "알았어....."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평상시와 다른 아이의 태도에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 있니? 엄마 지금 바로 출발해도 한 시간은 걸릴 텐데... "

"아니. 그냥. 알겠어. 그래서 몇 시쯤 오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늘 그렇듯, 별 일 아닐 거라고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런 날에는 액셀을 꾹 눌러 시속 150킬로로 질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후다닥,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달려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비보가 아닌 쪽지였다.

"엄마.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집에 온 걸 환영해!"

집에 온 걸 환영한다는 아이의 인사말에 버글거렸던 걱정이 눈 녹듯 사그라졌다. 작고 귀여운 포스트잇에 적힌 아이의 곰살맞은 쪽지를 떼어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중문 차례다. '엄마는 언제 오실까? 어떤 마음으로 집에 올까?' 아이는 염려했던 것일까?

뜬금없는 사과문이다.


"많이 도와줘야 되는데 맨날 화만 내서 미안해"

지금은 사춘기인 첫째 딸은 어릴 때부터 쪽지나 편지를 자주 써서 엄마에겐 곤 하였다. 다섯살 때는 예뻐서 버릴 수 없었다던 껌종이에 "너가 너무 좋쿠나."라고 큼지막하게 써서 나에게 주었다. 엄마에게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위로였고 고마움이었다. 이제 사춘기에서 벗어나 다시 예전에 애정표현을 많이 하던 꼬맹이로 돌아가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기대와 함께 아이에게 받았던 편지와 쪽지를 떠올렸다. 그 추억들을 글로 남겨두길 잘했다며 브런치 속 글들을 찾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거실에 들어섰다.






까만 어둠과 정적만이 가득한 거실에는 'Moon river' 피아노 연주곡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엇?! 이 아저씨는 누구지?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 나온 주인공 아저씨네. '

가만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티브이 화면에도 쪽지가 붙어 있었다.

"지금 틀어놓은 곡 엄마가 옛날에 좋아한다고 한 건데 ㅋㅋ 기억하고 있었지롱 ㅋㅋ"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차마 닿지 않는 작은 손으로 열심히 바이올린 연주를 하던 일곱 살의 아이가 떠올랐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13년이란 세월 동안 우린 서로를 알게 되었구나. 추억이 이렇게나 쌓여 있구나.' 별안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짙은 어둠을 뚫고 불을 켰다.


식탁에 앉으니 이곳에도 아이의 편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노랗게 윤이 나는 망고가 달콤한 향을 풍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맨날 못 먹으니까. 이거는 엄마 드세요!! 내가 해놨어 ㅎㅎ"

과육이 미끌거려서 껍질을 벗기기도, 썰기도 어려웠을 텐데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나 컸는지..... 망고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두툼하고 동그란 부분은 아이들에게 늘 양보하던 나였다. 단단한 씨가 있는 부분이 맛있다고 늘 그것만 먹곤 했는데 아이의 마음은 엄마에게 더 좋은 걸 주고 싶었나 보다. 잘 익은 망고가 입안에 몰씬하게 흐물거렸다. 달달한 망고와 달달한 마음을 음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실, 주방, 싱크대까지 광이 나도록 깨끗했다.




"엄마 많이 사랑해. 내가 집 치우고 설거지 다 해놨는데 00 이가 계속 안 치워서 그냥 내가 치웠어. 책방 문 앞, 비티에도 봐봐"


그 짤막한 사이, 동생의 만행을 이르는 것도 잊지 않아야 첫째 딸이지. 가만있자. 티브이는 이미 봤고, 책방 문 앞에도 뭐가 있다고? 그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낯간지러워서 표현을 못할 뿐이지 항상 너무 고맙고.. 고마워!! 엄마도 애교 많은 딸을 원했을 텐데 표현 잘 못해서 매번 미안해"


하이라이트가 남아있었구나.

우리 딸의 마음이 렇구나. 늘 툴툴 거리는 말속에도 엄마에 대한 애정이 살아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야 말로 바쁘다는 핑계로 너의 말에 귀 기울여줄 시간도, 따뜻한 밥 한 끼 챙겨주는 것도 어려워 늘 미안했는데 우리 딸이 엄마보다 더 너그럽구나.


그날의 감동을 잊지 않으려고 포스트잇 하나하나를 떼어 화장대 거울에 붙였다. 바쁜 출근길에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지만 매일매일 변하는 사춘기 딸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게 끝난다면 사춘기 자녀와의 일상이 해피 엔딩으로 장식할 수 있으련만.

쩝,.

얼마 전 그간 소중히 여겼던 쪽지는 무참히 뜯겨 화장대 구석에 처박혔다. 맨날 화만 내서 미안하다던 아이는 무엇 때문에 또, 그리도 화가 났는지, 화장대로 달려와서는 무효라며 와싹와싹 구겨버렸다. 4월의 봄날처럼, 사랑만 고백하는 사춘기 딸이면 좋으련만, 우리의 관계는 예상치 못하는 날씨와도 같다. 언제 어디로 쳐들어와서 벼 팔 줄 모르는 아이를 견디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날을 기억한다.

오늘처럼 삭막한 겨울날에도 안온한 봄날을 기억한다. 오늘처럼 우리의 관계에 차디찬 바람이 쌩하니 불어도, 포동포동 젖살이 가득했던 배시시한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무참히 구겨진 쪽지라 할지라도 4월 어느 날의 감동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억할 것이다.




마흔의 나와 함께하는 아이들은 어떤가요?

아이에게 받았던 위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혹은 받았던 상처는요?


오늘  마음을 뒤집어놨을지라도 우리,

아이들을 통해 행복했던 그날을 떠올려봐요.

어린 시절, 재롱 피우던 동영상을,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해보도록 해요.




"언제 어디 쳐들어와서 또 무슨 생트집을 잡을지 모르는 아이를 견뎌내는 엄마.

예상 못할 일을 하며 엄마인 나를 놀라게 할지라도 버텨내는 엄마.

적당한 거리에 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모든 시간을 함께 견뎌내는 엄마.

아이 곁에서 아이의 부정적인 생각과 그림자를 읽어주는 엄마가 사춘기 아이에겐 필요합니다.


                                                          <지랄발광 사춘기, 흔들리는 사십춘기 중에서>




p.s 그간 아이의 쪽지 속에 피어오른 이야기


https://brunch.co.kr/@mindneedlework/81

https://brunch.co.kr/@mindneedlework/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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