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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기자 Oct 24. 2021

"내가 너를 활로 쏘아버리겠다"

활만 생각하면 그날의 울분이 떠오르는 이유

 아이가 두 돌 때쯤 되었을 무렵이다. 남편이 국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대학시절부터 독립해서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며 삶을 즐겼던 사람이다. 요가, 골프, 무술 등 운동도 다양하게 배웠고 줌바, 기타, 드럼 등 꾸준히 이것저것 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자유롭게 살았던 남편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빡빡해진 생활 속에서 취미 활동을 못하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회사에서 직책이 올라가면서 더 여유도 없어지고 스트레스가 많아졌다. 준비 없이 아이까지 생기니 여유가 없다는 생각에 다른 외부의 어떤 집중할 거리가 절실했던 것 같다. 아이가 좀 커서 걷고 말도 하니 아이가 제법 컸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취미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사직동에 있는 인왕산 끝자락에 ‘황학정’이라고 불리는 국궁 활터가 있다. 이 활터는 고종황제가 “우리 민족의 혼과 호국정신이 담긴 활쏘기를 국민 모두 익혀 심신을 단련해야 한다”며 1986년 경희궁 내 회상전 담장에 만든 것을 1922년 지금의 장소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황학정이라는 말도 ‘활이 날아가는 모습이 금빛 학의 날갯짓과 같다’고 해 붙여졌다고 한다. 서울 시내에 5개에 이르던 국궁터 역할을 하던 사정이 일제강점기에 없어지고 유일하게 황학정만이 남았다.      


 남편은 이 동네에 자리 잡았을 때부터 황학정에서 활을 쏠 것이라는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활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나는 “1년만 더 있다가 배우면 안 되겠냐”라고 했다. 아이가 36개월만 돼도 편하다고 하더라, 적어도 30개월은 넘고 시작하라고 했다. 지금은 아이한테 손이 너무 많이 간다. 그때 배워도 늦지 않는다. 그때 가서 해라고 했다.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 2시간만 하면 된다고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다. 그러면서 같이 배우자고 했다. 아이도 데려가서 말이다. 어이가 없었다.


 일주일에 4일은 회사 일로 술자리 약속이 있어서 밤 12시나 새벽에 들어온다. 어쩌다 한 번 저녁 8시에 집에 들오는데 피곤해서 거의 뻗어 있다. 피곤하다 보니 주말에도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을 수밖에 없고, 그 마저도 회사일로 나가야 할 때가 많았다. 도대체 언제 활을 쏜다는 말인가. 그리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 감기도 잦고, 유행성 질병은 다 걸려올 때였다. 연로하신 양가 어르신은 멀리 떨어져 살고 가까이에 친척, 친구 하나 없어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상황에서 바쁜 남편이 활까지 더 하겠다니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돌파구가 절실했던 남편은 끈질기고 반복적으로 나를 설득했다. 결국, 가족 이름으로 신청을 했다. 그 한 겨울에 아이를 데리고 황학정으로 가서 오리엔테이션을 듣게 되면서 알게 됐다. 3단계 정도 나눠 시험을 치면서 그 시험에 통과한 사람만 황학정 회원에 가입되는 구조라고 한다. 단순히 토요일 오전 수업만 들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첫 강의 때 아이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빡빡하게 사람들이 모인 강당에서 활을 들고 있자니 짜증이 나서 나와 버렸다. 먹고 자고 싸는 생존의 일상도 지키기 어려울 시기였는데 활이라니, 나에겐 뚱딴지같은 일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삶에 탈출구처럼 활에 집착했다. 시험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남편은 틈만 나면 활을 쏘러 갔다. 회식이나 접대 자리 때문에 힘들다며 아이는 안 보던 남편이 술을 마신 다음날에도 활을 쏘겠다며 벌떡 벌떡 잘도 일어나 나갔다. 내 심정은 ‘환장하겠다’ 그 자체였다. 남편이 남 같은 순간이었던 나날들이었다.  


 내가 낳은 딸이지만 우리 아이는 순한 아이가 아니었다. 예민하고 까다롭고, 요구가 많은 아이였다. 오감도 예민하고, 작은 것에도 놀라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누구 집 아이도 조카들도 대다수 아이를 잘 돌보는 나였지만, 우리 아이는 남달랐다. 아이도 나도 서로 어쩔 줄 몰라서 아이를 껴안고 같이 운 적도 많았다. 그 기간에 남편은 정말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차를 한 대 더 샀으니, 나는 활을 쏘겠다’는 마인드의 남편을 보며 ‘인생 망했다’는 생각을 했다.


 

황학정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진 것이다. 엄마가 자궁경부암이라고 연락이 왔다. 강남 차병원에서 수술을 하기로 했다고. 입원 기간에는 강남에 사는 이모에게 엄마를 맡기고 수술 당일에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내가 차병원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가 때마침 유행성 폐렴에 걸린 것이다. 엄마가 수술하기로 한 전 날 아이도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그런데 예민한 아이가 병원을 거부하고 병원 침대에 앉아있는 것조차 거부해서 남편과 내가 교대를 하며 하루 종일 유모차에 태우고 링거를 끌며 병원을 돌아야 했다. 불안감이 높은 아이는 엄마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엄마 수술하는 날, 나와 떨어지지 못하는 아이 때문에 결국 엄마는 수술실에 혼자 들어갔다. 지방에 사는 동생도 아이를 낳고 정신이 없을 때이고, 이모도 입원기간 부탁을 했기 때문에 수술 날은 취소할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었다. 내가 가기로 했는데 가지를 못했다. 중요한 회사 일정이 있던 남편이 서둘러 마무리하고, 아이를 어렵게 맡기고 차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엄마의 수술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엄마가 수술실에서 나오고 잠깐이지만 병간호를 하고 간호사(간호간병 통합 서비스를 하는 병원이었다)에게 거듭 부탁을 드리고 다시 서울대병원으로 왔다.


 엄마가 퇴원할 때도 강남에 사는 이모에게 맡기고 우리는 아이를 퇴원시켰다. 아이를 담당했던 의사 선생님도 아이가 깨끗하게 나을 때까지 입원을 더 하면 좋겠지만 낮밤으로 울며 병실을 거부하고 병원을 계속 돌고 있는 우리 가족을 보며 퇴원하고 통근 치료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내일 활 시험이 있는 남편은 모든 생각이 활에 꽂혀 있었다(그랬겠지, 이제까지 열심히 달려왔는데 시험에 떨어질 수 없었겠지, 시험에 떨어지면 1년 후에 다시 신청하고 배워서 시험을 봐야 했다). 활을 쏠 때, 활시위를 당기는 깍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병원에서 잃어버렸다며 몇 시간을 돌아다니며 찾는 남편을 보는데... 난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머리는 어지럽고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어쩌자고 이런 사람이랑 결혼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아이가 퇴원한 밤, 내일 시험이니 활 연습을 하러 가겠다며 집을 나서겠다고 하는 남편에게 드디어 나는 폭발했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형님에게 전화를 걸며 울며 하소연했다. 형님은 늘 내 편이었다. 화가 난 형님이 시어머니에게 얘기를 했고 어머니도 화가 나서 “너는 엄마가 죽어도 활 쏘러 가겠다”며 “장모가 아프고 애도 아픈데, 어떻게 활 쏘러 갈 생각이 드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활로 너를 쏘아버리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결혼을 할 때도 "우리 아들이지만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부분도 있지만 까다롭고 쉽지 않은 아이다. 알고 있냐"며 "네가 골랐으니, 나는 모른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던 시어머니다. 아이를 낳고 나 대신 남편에게 던지는 시어머니의 욕은 언제나 위로가 되었다.


 나이가 많은 남편이 철이 든 건,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이다. 이미 아이가 36개월이 지나 정말 많이 편해진 이후이기는 했다. 회사 회식과 술자리가 없어지고 활터도 문을 닫고, 골프장도 조심하고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알아서 하더라. 물리적인 시간이 많아지자 모든 것이 알아서 해결됐다. 아이와 더 많이 시간을 가지고 관심도 가지고 여유가 생겼다. 아이가 30개월 전까지 그 시간이 나한테도 감당이 안될 만큼 압박이 크고 힘든 시기였지만 남편도 그랬던 것 같다. 그 힘듦을 자기 나름 데로 활로 풀며 집착했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때 일이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지금도 ‘활 이야기’를 하면 할 말이 없는 남편은 설거지를 한다. 평생 우려먹을 소재거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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