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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기자 Oct 24. 2021

아이 있는 엄마가 부암동에 산다는 건...

임신을 하고 나면 부암동 공간을 보는 시각이 확 달라진다.

 임신을 하고 그렇게 아름답던 부암동 산책길이 더 이상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았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걱정으로 몸이 무거워진 뒤에는 힘들어서 산책을 못했다. 집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나라도 어수선했다. 대통령 탄핵 시위와 탄핵 반대 시위가 끊이질 않던 2016년, 그때이다. 임신 초기였을 때 한 번은 시위 신고를 하지 않은 탄핵을 반대했던 시위대가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하는 바람에 효자동으로 버스가 들어가지 못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버스도 택시도 들어오지 않았다. 난감했다. 게다가 출혈이 있어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나는 걸어갈 수도 없고 차를 탈 수도 없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청운동에 다다랐을 때, 버스가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다들 버스를 기다리던 상황이라 승객을 태우지도 못하고 버스가 지나가기도 했고, 태우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밀어 넣으며 몇 명 타지 못했다. 임신한 몸으로 사람들과 몸을 밀치며 타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결국 청운중학교를 지나 산을 하나 넘어 걸어서 집에 올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소나기는 왜 내리는 건지. 어디 들어가 쉴 곳도 없는 학교만 있는 언덕길에서 말이다. 좀 서러웠다. 그 이후로도 시위대로 자주 차에 갇혀 있는 적도 있고, 걸어 간 적도 있다.   


 눈이 왔을 때는 더욱 난감했다. 제법 무거워진 몸으로 제법 쌓인 눈을 밟고 지나가는데 밤사이 기온이 내려가 눈이 얼 어이 었던 것이다. 높은 언덕길, 내려가지도 못하고 올라오지도 못했다. 그대로 양팔을 벌린 채 어렵게 균형을 잡으면 서있었다. 마침 눈을 쓸기 위해 나온 이웃 주민의 도움으로 언덕길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그 해 내가 지나갔던 언덕길에 어느 이웃이 눈길에 미끄러져 팔이 부러진 건 한참 뒤에 알았다.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눈 내린 풍경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이 동네가 더 쉽지 않았다. 언덕길에 아이를 데리고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동네에 실내 놀이터는커녕 실외 놀이터도 없었다. 옆 동네 산 꼭대기에 있는 놀이터는 차가 없으면 가지 못했고 택시 기사분들은 가까운 거리에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니 승차를 거부했다. 유모차를 끌고 언덕길을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고 아이 엄마를 만나기는 더 어려웠다. 모일 공간이 없으니 동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다. 요리를 하다가 뭐 하나 떨어져도 사러 내려가려면 언덕길을 내려가야 했고, 그 마저도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어렵게 친구를 사귀어도 만나기 힘들었다. 어느 집이든 친구 집에 가려고 하면 산을 하나 이상 넘어야 하다 보니 쉽게 집에서 집으로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띄엄띄엄 만나다가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우연히 만나게 되면 놀고는 했다. "나는 왜 이 동네에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을까", 서럽고 힘들고 무기력한 시간들이 있었다.


 결국, 아이가 두 돌이 되었을 때쯤 우리 부부는 차를 한 대 더 마련했다. 미숙한 운전 솜씨에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목숨 걸고 아이를 태우고 다니며 운전에 익숙해졌다. 그러고 나니 이 상황들이 조금씩 나아졌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쉬워졌고 구기동, 평창동, 삼청동 등 인근 동네에 다양한 공간에 가기도 했다. 동네 엄마들도 조금 알게 되고,  약속을 잡아 놀 수도 있었다. 다른 집들도 아이를 낳고 나서는 차가 없으면 차를 마련하고 차가 있어도 차를 한 대 더 마련했다. 차 없이 아이를 키우기는 힘든 동네다. 물론 차가 있어도 육아를 하기에 쉬운 동네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버티다 보면 또 다른 매력들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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