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오공사 #6
참 많이도 들었던 것 같은 말. '넌 꿈이 어떻게 되니?' 다만 장래희망이 아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군가의 진짜 바램을 궁금해하면 안 되는 것처럼.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늙어가고 싶느냐에 관한 이야기는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작가의 제일 마지막 꿈은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하루를 조금 느리게 보내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온화한 웃음을 가진 할머니. 나이 들어감에 겁먹지 않고, 경험이 위선이 되지 않고, 때로는 철부지 같은 그런 귀여운 할머니. 하지만 웃기게도 내가 보고자란 우리 할머니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태어나서부터 20년을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나와 동생들은 6남 2녀의 자식을 키워낸 우리 할머니의 마지막 육아 대상이었다.
장년을 넘어서 핏덩이들을 데리고 산다니. 심지어 맞벌이로 바쁘던 자식 부부를 대신해 메인 육아를 맡아서 하다니. 그런데 어떻게 이 할머니가 귀여울 수 있었겠는가. 안 그래도 억척같던 삶이 더 거칠어졌을 것이다. 애들을 씻기랴, 밥 먹이랴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을게 뻔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60-70대에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내 생에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손녀 육아라니.
사실 나에게 할머니 이야기는 온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 할머니, 부모님, 나, 여동생 2명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던 곳은 또래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가득한 시골 마을이었다. 적당한 시골이 아닌 진짜 시골마을. 슈퍼를 가려면 읍내를 나가야 하고, 읍내를 가려면 버스 배차 간격이 넓고 정확하지 않아 부모님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 내 어린날이 있다. 할머니와 일요일에 전국 노래자랑을 보고 기본요금 4500원 택시를 타고 읍내로 나가 손짜장을 먹은 날. 할머니와 마당에서 고구마 줄기를 다듬은 날. 초여름 마당에 있는 앵두를 따고, 설탕을 버무려 먹던 날.
내가 어른이 될 때쯤 할머니의 몸이 하나씩 고장 나고, 병원에 들어가시면서 가장 많이 하던 말은 '서울 조심해야 한다.'와 '얼른 잘돼서 할머니 손뼉 소리가 병원 천장을 뚫고 하늘에 닿게 해야지'였다. 나는 그 당부들을 몇 백번을 듣고 몇 백번을 알겠다고 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매번 이 되었다. 서울에서 본가로 내려가서 병원에 갈 때마다 우리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했다. 그만큼 서울에 혼자 있는 손녀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고운 손을 맞잡은 주름진 손은 따듯했고, 늘 한결같았다.
몇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마지막 장면의 대다수는 요양 병원 침대 위였다. 그 위에서도 우리 할머니는 똑같은 말을 내게 전했다. 그 말을 안 하면 정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 마냥. 그럼 나는 또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곤 서울 올라갔다. 지금은 그 말들이 부적처럼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도 가끔 할머니 영상을 볼 때면 아직도 할머니가 내 걱정을 하고 있을 것만 같고 아직도 내가 행복하길 하염없이 바라고 있을 것 같다. 손뼉칠 준비를 하면서.
할머니 이제 나는 눈뜨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7년째 탈없이 잘살고 있어. 시골뜨기 티 다 벗었어 이제. 그리고 아직 멀었지만 할머니가 손뼉칠 수 있게 열심히 살아볼게.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때 할머니가 멀리서 본 내 모습이 어땠는지 알려줘. 나는 그 전까지 할머니가 남긴 당부들로 잘 살아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