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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Oct 19. 2021

누구도 대신 싸워 줄 수 없을 때

소녀 검객, 두려움을 찌르다 

하엘이는 펜싱을 한다. 워낙 액티브하고 운동신경도 있는 편이라 안 시켜본 운동 없이 많은 종목들을 해보았지만, 겨울이 긴 보스턴에서는 실내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쩌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우연한 기회에 펜싱을 접하게 되었다. 친구들 좋아하고 으쌰 으쌰 하는 거 좋아하고 몰려다니는 것 좋아하는 하엘의 성격에 개인 운동보다는 팀 스포츠가 적성에 더 맞는 듯했으나, 웬일인지 아이는 펜싱 가는 날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다니더니 어느덧 그 긴 칼을 쥐고 날아다니는 fencer가 되었다. 


2년간 꾸준히 수련만 하다가 몇 주 전 처음으로 토너먼트에 나가게 되었다. 뉴잉글랜드 전역과 뉴욕, 뉴저지, 펜실베니아까지 아우르는 나름 큰 State Competition이었는데, 그것은 쫄보 중 쫄보인 나와 하엘에겐 너무나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특히나 하엘은 경기 며칠 전부터는 "엄마 엄마 나 너무너무 떨려. 힘이 되는 얘기 좀 해줘"라며 밤마다 잠들기 전 나를 찾았다. 처음 나가는 경기니까 그냥 경험만 해보고 와도 된다며, 한 번도 이기지 못해도 괜찮다며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는데 하엘은 말했다. "엄마, 사실 경기 몽땅 지는 건 걱정 안 되는데, 가서 옛날 클럽 친구들 만나는 게 너무 걱정돼."


사실 그랬다. 지난 2년간 친한 친구들과 재밌게 다니던 펜싱클럽이 저번 달에 우리 집으로부터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집에서 가까운 클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친구들 그룹에서 홀로 빠져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친구들을 상대로 겨뤄야 한다는 것이 관계지향적인 하엘에게는 경기의 승패보다도 더 떨리고 걱정되는 일이었나 보다. 



 

아침부터 있는 경기를 위해 새벽 일찍 집을 나서며 3시간을 운전해 도착한 경기장. 그 무거운 가방을 낑낑 메고 도착한 스타디움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검투사들로 바글거렸다. 찌르고 베고 포효하는 그곳의 공기는 마치 차디 찬 정글에 들어온 것 같았다. 마스크를 쓰고 펜싱 옷을 입고 있으니 모두 다 똑같이 생겨 우리 클럽이 어딨는지 찾을 수가 없어 두리번거리며 헤매는 동안 등 뒤에서 누군가 하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보니 예전 클럽에서 함께 했던 하엘의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하엘에게 그 아이는 말했다


"배신자."


배신자라니. 어차피 만나서 겨룰사이, 초장부터 기를 죽이려는 심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아이의 한마디는 나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오히려 하엘은 덤덤한 거 같았는데, 쫄보 엄마인 내 입장에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한마디였다. '안 그래도 하엘이가 잠도 못 자고 걱정하던 부분이었는데, 너 꼭 만나자마자 그렇게 말해야 했니 정말?! 내가 연습 끝나고 너네 아이스크림을 얼마나 사줬는데! 이것들이 쥔짜....' 부들부들 거리는 나와는 달리 하엘은 "이따 경기 잘하자" 그러고 쿨하게 뒤돌아 걸어 나갔다 (헐. 멋져). 


"하엘아, 걱정하지 마. 쟤 괜히 저러는 거야. 긴장할 필요 없고, 그냥 자신 있게 하면 돼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블라..."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아이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괜히 더 긴장한 나는 입에 모터를 단 마냥 뭐라고 끊임없이 말하는데, 하엘은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엄마. 제발 그만 좀 말해줄래." 




경기가 시작되고 하엘은 한번 이기고 여러 번 졌다. 

몇 초 안에 모든 싸움이 끝나는 경기. 

내 편은 나밖에 없이 혼자 이겨내야 하는 싸움.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는,

결과의 책임을 온전히 홀로 짊어져야 하는 일. 


한번 빼고는 계속해서 지고 있는 아이를 보며 나는 대신 싸워 줄 수도, 무조건 잘한다고 응원만 할 수도, 그만하고 가자고 할 수도 없이 아이가 한 동작 한 동작을 할 때마다 옆에서 함께 발은 동동 구르면서도 입술로는 그저 기도 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이기게 해달라고 해야 할지, 마음의 상처 안 받게 해달라고 해야 할지, 그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저 그분의 이름만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어젯밤에. 했던 얘기 기억나지?" 


경기 전날 밤, 하엘이 만큼 긴장했던 나는 하나님한테 물었다. 이거 하는 거.. 맞는 거 맞냐고. 그냥 친구들이랑 재밌게 뛰어다니는 팀 스포츠 시킬걸, 괜히 펜싱 해서 아이한테 상처만 주는 거 같다고. 안 그래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하엘인데. 잘못한 거 같다고. 괜히 한 거 같다고. 후회와 미련의 아이콘인 쫄보 엄마는 하나님 앞에서 밤새 궁시렁궁시렁 거렸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엘이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친구들을 품을 줄 아는 아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그리고 나는 그 아이의 그런 부분을 분명히 들어 쓸 거란다. 하지만 하엘이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나와 홀로 있는 법을 배워야 해.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는 그 외로운 싸움을 오직 나만을 의지해서 나와 함께 싸우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왕이 되기 전 다윗이 오랜 시간 홀로 목동 생활을 하며 나를 예배했듯. 이스라엘 온 민족을 인도하기 전 모세가 40년을 혼자 광야에서 나를 알아갔듯. 홀로 싸우는 이 시간을 통해 하엘이는 나의 돕는 손길뿐만 아니라 내 얼굴을 구하는 법을 알게 될 거야. 나와 홀로 싸우는 훈련이 충분히 되었을 때 하엘이는 만인 속에 들어가도 나를 가장 먼저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나를 믿고 이 시간을 충분히 즐겨 보렴. 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해봐."


그리고 그날 밤, 하엘이와 이 마음을 나누고 함께 결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If we win, we praise Him. 

If we lose, we praise Him!"

우린 이겨도 감사, 져도 감사할 거야! 




'맞다. 그러기로 했지. 그게 진실이지. 우리는 여기 이기러 온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홀로 싸우는 법을 훈련하는 중이지.'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혼자 싸우고 있는 하엘이를 바라보는 내 렌즈가 바뀌는 동안 하엘의 마지막 경기가 끝났다. 


머리는 땀에 흠뻑 젖은 채 탈진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하엘이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함께 하이파이브를 할 친구도 없이, 자랑할만한 결과도 없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어린 딸이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잘했다고 말하면 믿을까. 괜찮다고 말하면 싫어할까. 나라면 이제 펜싱 그만한다고 할거 같은데.. 그만둔다고 하면 뭐라고 하지. 수많은 문장이 스쳐 지나가며 하엘에게 다가가 물병을 건내는데 하엘이 먼저 말했다. 


"엄마, 이번에 진짜 어려웠어. 다들 정말 잘하더라. 나 근데 이번 경기에서 한번 이겼으니까, 다음번 경기에서는 두 번 이길 거야. 일단 그렇게 목표를 잡으면 될 거 같아."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내 마음속에만 간직했던 하엘이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로 믿어졌다. "그래! 우리 빨리 나가서 김밥 먹고 아이스크림 사 먹자~ 너랑 나랑 둘이니까 꼭 소풍 온 거 같아!" 


"나는 너의 모든게 다 고마워"


결과에 상관없이 이 아이는 홀로 이렇게 훌륭히 싸움을 해냈다.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어도. 마음 아픈 소리를 들어도.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해 포기하고 싶어도. 아이는 무언가 깨닫았는지, 다음을 기약하고 아주 조금 더 잘하겠다고 다짐한다. 스스로 해봄직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와중에 어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말씀을 듣고도 까먹고 벌벌 떠는 엄마가 옆에 있었지만, 하엘은 또 이렇게 한 뼘 자랐다. 



나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엄마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열띤 응원도, 깊은 탄식도 아이에게는 큰 도움이 안 될 테다. 하지만 내가 먼저 홀로 가는 그 길을 그분과 함께 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있겠다. 누구도 대신 가줄 수 없는 길. 대신해줄 수 없는 싸움이지만, 사실 정말 혼자인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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