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이 대도시의 토박이 딸이다. 이 도시와 나는 늘 힘겨루기를 했다. 모태가 편치만은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달아가는 일, 자라날수록 점점 더 맞지 않는 옷에 나를 껴맞추어 가는 것 같은 일은 한 소녀의 성장과정에서 순탄치 않은 감정의 동요를 선물했다. 아마 이 큰 도시의 수많은 모서리에 놓인 아이들이 그럴 것이다.
사실 불행했냐면, 그건 전혀 아니다. 감사하게도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세 분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납득이 되지 않으면 수억을 준다 해도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방랑은 운명이다. 그렇게 이방인이란 이름은 내 평생의 일기가 되었다.
그러던 내가 오랜 고민의 테이프를 끊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도착한 날은 귀환이 믿어지지가 않아 사대문 안쪽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걸어 다녀 보았다. 날이 제법 쌀쌀한데도 크게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고, 낯선 듯 익숙한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나 그런 기분 좋은 마음도 잠시, 곧 나의 좌충우돌 고향 적응기가 시작되었다. 누군가들은 이미 여물대로 여문 시점에, 성인 시기를 겪어보지 못한 사회로 인턴사원처럼 발을 들이민 것이다. 사람도, 시스템도, 모두 어려운 숙제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3년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 시간 동안 깊은 생각은 하지 말고 무엇이든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살아보자.
10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하는 것이나 즉흥적으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일 등이 일상이었던 내게, 이 작은 한반도에서마저 비슷한 분량의 동선이 주어졌다. 그러나 일의 밀도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두터웠다. 학부 때 밤을 새우고 또 새도 해결되지 않던 그 시간이 재현되는 듯했다. 하나 일이 바쁜 것은 차라리 고마운 일인지도 모른다. 벗어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면서, 감정적으로도 두 번째 스무 살이 다시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전과 달라진 게 있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서 바라본 내 고향의 모습은, 그 안에 있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처음 밖으로 나갔을 때엔 한국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에, 집에는 가고프나 서울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나였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참으로 아프고 안타까운 뿌리에서 살아남고 살아내기 위해 그 어떤 지역 사람들보다 고군분투하는 삶의 열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처는 깊고, 아물 길이 없는 이 땅에서 그저 살아내기 바빴던 사람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점점 뿌리가 갈라지고 마치 내 하늘과 네 하늘은 다른 양 그렇게 조각내는 사람들, 아니 우리들.
서울에 도착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았을 때, 강남대로에 나갈 일이 있었다. 지하철 출구 계단에 발을 들이미는데 이미 현기증이 났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탈출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방향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당시엔 아직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기 전이라, 어리바리한 얼굴로 여기저기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묻기 시작했다. 하나 말씀 좀 묻겠다며 아무리 붙잡아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를 피하는 것이었다. 어디서도 겪어보지 못한 불친절을 느끼며 좌절할 때쯤, 이내 알아챘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든 낯선 사람의 예의 있는 접근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어디 어디가 어느 방향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알다시피 이건 아주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다. 이렇게 나는 그들을, 그들은 나를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내게서는 한동안 고향을 바라보는 방랑자 시점이 사라지지 않았다. 남의 땅인 듯 이곳에 조심스레 와서 세입자처럼 버티는 심정이랄까. 버스를 타면 습관처럼 오른쪽 맨 앞자리가 비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자리에 앉아 통유리로 이 적응되지 않는 도시를 여행지 보듯 바라보았다. 주차장처럼 꽉 찬 도로, 넘치는 사람들, 빈틈없는 건물들. 눈도, 귀도, 마음도, 쉴 틈이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 애잔함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그 그림 안에 자연스레 들어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가끔씩 울리는 전화 한 통에서 들리는 고소한 말 한마디, 깨알같이 웃는 우정에 속단추 하나 풀린 듯 후련해지는 속내를 느끼면서 말이다. 그래도 울고 싶을 때 마땅한 장소를 찾기 어렵다는 건 때론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새로운 깊은 인연들로 인해 천사는 어디든 있다며 감사하던 어느 날, 소중한 분들에게 서울 투어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네 사람이 차로 그냥 한 바퀴 쭉 돌면 그만인 것을, 굳이 서울 투어 버스의 티켓을 사서 도는 일을 함께 자처해 주신 분들이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관광객 모드로 동화면세점 앞에 모여 버스를 타고 남산타워에 올라갔다. 각자의 모드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어찌나 친근해 보이고,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내 고향은 어찌나 넓은지. 어찌 보면 좁은 것은 나이고, 조여 오는 것은 내 껍데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또 다른 구원은 시작되었다.
신기한 것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니, 오히려 어디에 있어도 괜찮다는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듬해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여러 여정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역사의 인물들을 만나는 시간여행으로 조금 더 확실하게 방향을 굳히면서.
그러던 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슈타인바흐 암 아터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가 함부르크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 여름휴가 기간 동안 오로지 작곡만을 위해 머물렀던 오두막이 있는 호숫가 시골마을이다. 여름이 아니면 인적이 드문 곳이라 내가 방문했던 겨울에는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도착하니, 몇 개 없는 상점은 다 문을 닫았고, 인적조차 드물었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알프스 자락과 어우러진 아터제의 청명함은 아무도 없는 초행지에 방문한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 오두막을 관리하고 있는 푀팅어 호텔이 바로 나왔다. 비시즌이라 운영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미리 전화를 해서 방문 의사를 밝혀 놓은 터. 그곳에서 오두막 입구의 열쇠를 받고 나와 자연의 소리만 존재할 것 같은 길을 조심스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애꾸눈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는 것 아닌가. 그 아이는 나와 눈을 맞춘 후 작곡 오두막 쪽으로 위풍당당하게 날 이끌더니, 입구에 다다르자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도착했음을 알렸다.
인적이 없는 이런 곳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 살갑게 대할 수 있는 것인가? 다음 버스가 당도하여 이 청명한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아이는 품에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말도 걸고, 호숫가에서 재롱을 떨기도 하며 나와 서로 무장해제되어 몇 시간이나마 진한 우정을 나눴다.
그 아이는 누구일까? 또 다른 천사일까? 작은 곳에서도 끊임없이 이끌어주는 보이지 않는 손길 덕분에, 지금도 내 마음을 '그 자리'에 사뿐히 내려놓으며 기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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