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 이름 한태윤. 돌아가신 할머니가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이다. 클 태, 인륜 륜. 직역과 의역을 혼합해서 해석하면 '존귀한 도리'라는 의미이다. 할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태윤이란 이름을 골랐는지는 모른다. 할머니의 욕망이 반영된 작명이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나는 26년간 살아오면서 크거나, 높거나, 존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다했는지도 모르겠다. 단체에 소속되면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말 없는 나무나 바위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점은 하나 있다. 바로 내 성씨인 청주 한 씨.
물론 진짜 양반 가문이었을 가능성보다는 조상 중 한 분이 조선 말기에 족보를 사들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상관없다. 지금 나는 서류상 청주 한 씨로 등록되어 있고, 내 조상 중에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한명회는 파란만장한 생을 보내고 1487년에 사망했다. 그 후 1504년 7월 2일, 무덤에 묻혀있던 시신이 꺼내어져 토막 났으며, 그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효시했다고 한다.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나는 1999년 7월 2일에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논리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지만, 나는 이 우연의 일치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세기말과 부관참시의 조합이라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그야말로 한 편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다.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와 전 세계가 멸망의 공포로 뒤덮였던 1999년 7월의 세기말.
두 사건에 함께 얽혀있는 나는 개인적인 치욕과 전 지구적인 파멸을 동시에 업고 태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자기 파괴와 세계 파괴 중 어느 하나에라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가? 뭐, 둘 중 골라보라면 확실히 자기 파괴가 더 쉬울 것 같긴 하다. 내 안에 무언가가 들끓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지는 않다. 이 아름다운 세계도 마찬가지고.
나는 허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뭔가를 만들어 보고 싶다. '창조적 승화'라는 거창한 이름은 붙이고 싶지 않다. 그냥 꺼내놓고 싶을 뿐이다. 내 안에 기거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그렇기에 내일의 창작 강좌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아휴, 또 쓸데없는 생각에 잡아먹혔다. 나는 늘 이렇다. 생각 하나가 떠오르면 곧장 내 안으로 철수해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나라는 인간의 특성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다.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아무튼, 억지로 필명을 짓고 싶진 않다. 일단 가보고 생각하자. 실명도 괜찮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