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소리, 향기, 그림자

9.

by 김빗

'내일이구나, 첫 수업.'

나는 다시 한번 강의계획서를 읽어보려고 다운로드한 자료를 클릭했다.


<문학 창작 강좌>

자신을 해체하는 글쓰기, 당신이 가진 모든 관념을 의심하는 글쓰기,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글쓰기.

[강사 - 소설가 허우미]


몇 번을 읽어도 신선한 제목이다.

"해체, 의심, 파괴."

부정성을 띤 세 개의 단어를 읊조리자 조금 들떠있던 기분이 가라앉는 듯했다. 이번에는 주어를 붙여 읽어보았다.

"나를 해체한다, 나를 의심한다, 나를 파괴한다."

마치 과격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은밀한 장소에 모여 외쳐대는 구호 같기도 하다. 아닌가? 과격 단체의 표면적인 먹잇감은 외부에 있지, 내부에 있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자기 성찰을 목표로 하는 단체인가?
뭐가 됐든,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관성을 깨트리기 위해 자신에게 충격을 가한다는 느낌이 드는 매력적인 구호이다.

'나'라는 자아는 없다! '개인'이라는 주체도 없다! 오직 '단체'를 위한 희생만 있을 뿐이다!

음... 중간 단계를 죄다 날려 먹은 표류하는 공상일 뿐이다.
이번에는 강의계획서에 적힌 문장 전체를 소리 내 읽어보자.

"자신을 해체하는 글쓰기, 당신이 가진 모든 관념을 의심하는 글쓰기,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글쓰기."

완성된 문장이 음성으로 변모해 귓속을 파고들자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힘든 일이지만 이 강좌를 듣기 위해서는 견뎌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


강의계획서 첫 장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이번 창작 강좌에 참여하는 수강생분들은 자신이 불리고 싶은 필명을 정해 오세요. 사람의 이름은 자기 결정이 아닌, 타인의 욕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힌 채 세상과 만납니다.

수업에 참석하는 동안만이라도 자기 의지를 투영한 이름으로 마주했으면 합니다. 수업 시간에는 직접 결정한 필명에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서로를 부르겠습니다.

물론 강요는 아닙니다. 실명 그대로 사용하고 싶은 분은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수업을 진행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첫 수업 때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조만간 뵙겠습니다.]

- 허우미 -


첫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나도 필명을 정해보려 했다. 하지만 딱히 불리고 싶은 이름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내 이름으로 하고 싶었다. 지금껏 불려 온 한태윤이라는 실명이 있는데 굳이 필명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막상 수업 전날이 되자 그래도 필명을 정해 가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keyword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08화목소리, 향기,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