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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an 17. 2023

회식자리에서 기억을 잃고 말았다

아찔했던 첫 블랙아웃


그동안 술을 아무리 마셔도 통으로 기억을 잃었던 적은 없었다. 중간중간 기억이 안 나긴 했어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 둘 다시 떠올랐고, 그게 남들이 말하는 '블랙아웃'이라고 생각했다. 


연차가 올라가자 골프를 배우라는 압박이 은근슬쩍 들어오기 시작했다. 돈이 없다, 시간이 없다 등 다양한 핑계를 대며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국장이 라운딩 일정을 잡은 것이다. "골프를 칠 줄 알든 모르든 이날은 무조건 나가는 거다." 국장의 한 마디에 그날 바로 골프 아카데미를 등록했다. 


첫 라운딩은 국장과 같은 팀 선배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라운딩 전날, 국장이 갑자기 술자리에 호출했다. 국장이 술자리에 평기자를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국장은 "우리 매체에서 정말 아끼는 기자"라며 좋아하는 인맥들에게 날 소개해줬고 국장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나는 또다시 열심히 소맥을 말았다. 


다음날, 아침 7시까지 골프장으로 오라는 국장의 부름에 새벽 4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차가 있는 선배 집 앞으로 이동했다. 잠을 거의 못 잤지만 첫 라운딩에 대한 걱정과 긴장감 때문에 졸리지도 않았다. 



반주할까?


골프장에서 아침을 먹는데 국장이 말했다. "반주할까?" 약간의 술을 마신 뒤 첫 라운딩이 시작됐다.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국장 컨디션은 좋아 보였다. 첫 라운딩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내 컨디션이 유난히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골프를 배운 지 약 1달쯤 된 초보자 입장에서 그 자리는 너무도 부담스러웠고, 힘들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니 선배들이 또다시 술을 찾았다. 그늘집에서 서둘러 막걸리를 마시고, 정신없는 상태로 다시 라운딩을 나갔다. 골프를 치며 계속해서 선배들 눈치를 살피고, 국장 눈치를 살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전날 마신 술, 첫 라운딩의 스트레스, 체력적인 힘듦에 막걸리 기운까지 더해져 라운딩이 끝났을 때 이미 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골프회식의 꽃은 라운딩이 끝나고 난 뒤 시작된다. 골프장 근처 술집에서 선배들은 계속해서 파도타기를 외쳤다. "첫 라운딩 소감이 어때?" 국장이 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니, 택시기사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가씨, 다 왔어요. 이제 일어나요." 핸드폰에는 국장의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혀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잠만 잤다. 



회식자리에서 맞이한 인생 첫 블랙아웃


시간이 지나도 회식이 어떻게 끝났는지, 어떻게 택시를 타고 집에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난 뒤 휴대폰에 찍혀 있는 부재중 전화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망했다'였다. 정말 손이 벌벌 떨렸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같은 자리에 있던 선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 저 술자리 중간부터 기억이 안 나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리고 저는 어떻게 집에 왔나요. 혹시 제가 실수한 건 없었을까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술자리에서 실수한 건 없었다고 한다. 선배는 내가 마지막에 국장이 대리기사를 불러 집에 가는 걸 보고 나서야 택시를 잡았다며, 술 취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만약 이 자리에서 말실수라도 했더라면, 회사 내부 회식이 아닌 다른 업체와의 회식이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살면서 술 마시고 기억을 잃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난 절대 그러지 않는다고 자신했는데 모두 오만이었다. 첫 블랙아웃 뒤로도 몇 번 정도 필름이 끊어지는 일이 있었다. 블랙아웃은 대표적인 알콜성 치매의 전조증상이다. 반복되는 건 뇌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는 걸 의미한다. 몇 차례 기억을 잃은 뒤에서야 지금 내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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