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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Feb 05. 2023

술은 내게 무엇을 남겼나


"여름씨는 왜 그렇게까지 술을 마셔요?"

"일을 잘하고 싶어서요.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어요."

"술을 안 마시면 일하기 힘든 구조인가요?"


두 번째 알콜중독 상담에서 의사 선생님은 내게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셨다. 상담을 마치고 술이 내게 가져다준 실익을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인맥을 넓히기 위해 정말로 많이 노력했다. 출입처를 바꾼 뒤 업계에 빠르게 적응하고 그 안에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술로 인해 얻은 것


1.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업계에 출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말 빠르게 적응했다. 잦은 술자리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취재원들과 자주 만나 끈끈한 관계를 만들었고, 기자들과의 술자리도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술자리에서는 중간에 도망가지 않고 무조건 끝까지 남아 모두를 챙겼다. 그런 모습은 좋은 평판으로 돌아왔고 어느 정도는 행복한 사회생활의 바탕이 됐다. 


2.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었다


업계에서 쌓은 인맥 중 공적인 사이가 아닌 사적인 사이가 된 친구들이 꽤 있다. 이 또한 술자리에서 친하게 지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같은 업계에서 서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다. 


3. 업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지난 1년간 5건 이상의 단독 기사를 작성했다. 그중에는 사회 전체적으로 이슈가 됐던 기사도 몇 개 있다. 기사가 여기저기 바이럴되고 큰 파급력을 일으키는 걸 보며 성취감을 많이 느꼈다. 


기자는 남에게 추천할만한 직업은 아니다. 박봉에 워라밸도 좋지 않은 기자를 계속했던 이유는 아마도 내 기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꽤 오래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술자리가 바로 단독 기사로 이어진 건 아니지만, 자주 만나고 친밀감을 쌓은 인맥들이 취재에 크게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술로 인해 잃은 것


1. 건강을 잃었다


누구를 만나든 "1년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디를 가도 피곤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실제로도 피곤하다. 건강이 상했다는 건 건강검진 결과에서도 드러났다. 지난해 부랴부랴 시간을 내 진행한 건강검진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술로 인해 건강이 아주 큰 폭으로 망가졌다. 


2. 내 삶을 잃었다


모든 것은 기회비용이다. 그중에서도 시간은 특히 더 그렇다. 평일 저녁 술 마시는 시간에 친구를 만날 수도, 연애를 할 수도, 하다못해 스터디를 하거나 학원을 다닐 수도 있었다. 업계에 적응하고 그 안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과했다. 출입처를 옮긴 뒤 스터디는 커녕 취미생활을 할 시간도 나지 않았다. 업계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아예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새로 옮긴 출입처에 대한 지식은 많아졌을지 모른다. 이 분야 인맥도 상대적으로 빠르게 구축됐다. 그런데 그 밖에 있는 모든 것, '기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내 삶은 사라졌다. 이전에는 기자로 일하면서도 비슷한 또래 직장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걸 공부하는지 생각하려 노력했었다. 그래야 밸런스가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마케팅 등 다른 분야 스터디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업계와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어느 순간 기자인 나만 남아있었다. 그동안 내가 끝까지 경계하려고 했던, 기자로서의 정체성만 남은 사람이 됐다. 어디 가서 업계에 대해 얘기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내가 쓴 단독에 대해 물어보고, 내 전문성을 인정받을 땐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 명함에서 기자가 사라진다면 난 대체 무엇일까. 아쉽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다. 


3.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남았다


"술을 안 마시면 일하기 힘든 구조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물론 술 없이도 취재를 잘하고 전문성을 인정받는 기자들은 많다. 하지만 난 아니다. 술을 마셔야지만 일을 할 수 있다면, 앞으로 이 직업에 대한 나의 비전은 과연 있는가. 술을 끊는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난 정상적으로 기자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도 쉽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술병으로 고생하는 동료들이 가득했다. 젊은 시절 술을 많이 마셨다던 선배들은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동료들과 항상 "우리 세대는 다를 거야, 다음 세대는 다를거야"라고 말하지만, 고군분투하는 후배들을 보면 술 마시는 문화는 여전하다. 나는 과연 사랑하는 후배에게 나와 같은 길을 걸으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게 못 할 것이다. 


출입처를 옮긴 뒤 회사에서도 업계에서도 정말 많이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무리해 일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쌓아온 것들을 보며 그동안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한 건지, 무엇을 위해 술을 마신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자 커리어를 던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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