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과 술, 이제는 안녕
"처음 회사를 옮겼을 때에는 그런 술자리 문화에 젖어들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때는 경계하는 느낌도 있었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도 같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네가 그 문화의 중심에 있더라고."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이런 말을 건넸다. 이직하기 전에는 친구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났다. 이직 후 만나는 주기가 길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2달 전에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마저도 평일에 쌓인 피곤을 이기고 집을 나서야 해 친구에 미안함이 컸다.
나에게서 직업을 빼면 남는 게 뭘까
기자로 일하며 가장 경계했던 건 내 삶에 '기자인 나'만 남는 것이다. 물론 직업이 누군가의 정체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기자님" 소리를 듣다 보면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출입처 직원들도 같은 직장인이라는 걸 까먹고 만 동료들을 많이 봤고, 그런 기자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게다가 삶의 다른 부분은 모두 사라진 채 직장인으로서의 자아만 남는다면, 그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기자로 일하며 '기자뽕'을 경계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결국 내 삶에서 '기자'의 비중을 낮추는 데에는 실패했다.
기자생활 초반부터 이렇게까지 술을 많이 마셨던 건 아니다. 지금 다니로 이직한 뒤 완전히 새로운 출입처를 배정받았다. 가장 부담이 됐던 건 연차에 비해 출입처에 대한 지식은 낮았다는 거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의 이름값에 걸맞은 기사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비슷한 연차 다른 기자들보다 잘하고 싶었고, 그다음에는 이 업계를 출입하는 그 어떤 기자보다도 잘하고 싶었다. 욕심을 정말 많이 부렸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연락하는 사람이라곤 죄다 업계 사람들 뿐. 활성화된 단톡방은 죄다 기자들과의 친목방뿐. 퇴근 후에는 뭘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결국, 번아웃
적극적으로 취재하다 보니 출입처 사람들과도 업계 기자들과도 굉장히 빠르게 친해졌다. 국장과 부장은 언제나 나를 칭찬했고 주변에서 날 부러워하는 시선도 꽤 있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과연 내 삶에도 좋은 일이었을까.
사실 알콜중독 상담을 받고 약을 먹으면서도,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까지 저녁미팅을 했다. 1주일에 최소 4~5일은 술을 마시다 보니, 차라리 상담을 받지 말걸 그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전에는 문제점을 모른 채 그냥 즐겁게 놀기만 했었는데 요새는 술자리가 괴롭기 때문이다. 술 때문에 고통받는 와중에 날 더 힘들게 했던 건 내 삶이 망가진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밤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8시까지 출입처로 출근했다. 월급은 거의 대부분이 택시비로 빠져나갔다. 분명 이직할 때 연봉을 크게 높여서 왔는데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이전보다 적었다. 정신이 없어 정작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그들이 보낸 메시지를 읽을 수도 없었다.
평일 내내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주말엔 쌓여있는 빨랫감과 설거지, 택배박스를 보며 허탈함을 느꼈다. 나는 고장났고, 망가졌고, 기사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에 자소서를 쓸 정도의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살기 위해 퇴사합니다
대학시절 사회적으로 정말 큰 참사가 있었다. 너무도 큰 무력감을 느꼈고, 만약 현장에서 내가 조사를 하거나 기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기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면, 그렇다면 워라밸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기자가 됐다.
누군가는 현실은 다르다 할 수 있다. 누가 회사생활을 하며 그런 낭만을 품느냐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냥 매일 아침 신문을 읽으며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하던 당시의 나는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기자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만약 내가 업계에 계속 남아있는다면 언젠가는 사회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실낱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아마도 내가 그동안 좋은 기사만 쓴 좋은 기자였는지 물으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좋은 사람이었는가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좋은 인상을 남겼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분간은 쉬겠지만, 아마 업계에 돌아올 때 이제는 기자가 아닐 것이다. 푹 쉬고 술과 멀어진 뒤 직장인으로 복귀할 생각이다.
과연 내가 술을 끊을 수 있을까. 어제도 집에서 영화를 보며 와인을 한 병이나 마셔버린 내게 알콜중독 치료의 길은 멀고도 멀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둔 지금, 이전보다 고무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술을 마셔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적당히 마셔야 한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