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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파노 Mar 13. 2020

도로가 아무리 거지 같아도, 사고를 치는 건 사람이다.

개발도상국이라서 환경을 탓하는 건 비겁한 일이다.

 자전거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도로에 팟홀(pothole)이 있었고, 나는 도로 중앙 쪽으로 핸들을 틀어 피하려고 했다. 팟홀의 오른쪽으로 피해 돌아가려던 순간에 맞은편에서는 어떤 차가 추월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내 뒤에서 나를 추월하려던 트럭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이 추월 차를 피해 내쪽으로 차를 가까이 붙였다. 이 운전자는 차폭감이 부족했는지 트럭 뒷부분으로 나를 쳤다.


 넘어졌고, 까졌고, 멍이 들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오르막이었던 터라 속도가 크게 붙지 않아 다행이었다.




 자전거를 같이 타는 친구들 중 자전거를 타다 교통사고가 나서 심각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자전거에서 떨어져도 낙차가 크지는 않기 때문에 며칠 쉬면 낫는 수준이다. 게다가 자전거에서 떨어져 나뒹굴면, 정말 말 그대로 나뒹굴어 충격을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나누어 받는다. 쓸림은 심할지언정 어딘가 부러지는 일은 드문 편이다. 한국에 있을 때 성실하게 동호회에 출석하고 라이딩을 나갔는데, 두어 달에 한번 꼴로 누군가는 사고를 쳤다. 그래도 반창고에 파스면 대부분 해결이 되었다.

 정말로 심각해지는 경우는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붙었을 때, 사고차량 밑으로 딸려 들어 라이더가 깔렸을 때, 사고차를 뒤따라 오던 차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라이더를 2차로 덮쳤을 때 등이다. 이번 건은 어느 경우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참 다행이라 할 만하다.

 여담이지만, 자전거를 꽤 오랫동안 취미로 했는데, 단 한 번도 사고다운 사고를 겪은 적이 없었다. 자전거가 거의 정지한 상태에서 간식을 먹거나 옆 사람과 떠들다가 자빠져서 손바닥이 까지는 정도야 있었지만 심각한 사고는 없었다. 차와 접촉 사고를 내거나, 내가 누군가를 치거나, 내가 치이거나 한 일은 없었다. 자전거 동호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이라 여겼는데, 오늘로 기록이 깨졌다. 



 별생각 없이 자전거를 타다가 갑자기 벌러덩 넘어졌는데, 순간 번쩍했던 것 말고는 균형을 잃었다던가, '이러다 넘어지겠다'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번쩍했을 뿐인데 나는 길바닥에 누워 있었고, 뒤에서 달려오는 차를 보고 정신이 들어 도로 바깥으로 몸을 피했다.


 아파서 괴롭다기보다는 화가 났다. 운전자가 먼저 사과를 했더라면, 아프면 내 차 타고 병원에 가자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면 그냥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사과는 한 마디도 없었고, 팟홀 때문이라고 변명을 했고, 나는 화가 났다. 사진을 찍어서 증거를 남기고, 경찰을 불렀다. 



  트럭의 뒷타이어가 자전거의 뒷타이어를 건드렸거나, 저 불룩불룩 튀어나온 것들 중 하나가 나를 건드린 것 같다. 트럭의 앞 타이어가 나를 지나치는 것 까지 보았는데, 갑자기 넘어졌다.


새끼야 니 차량번호는 내가 박제해 둔다.




 #또 시작이다 1.


 경찰에 전화를 하는데, 신호가 가지 않기도 했고, 누군가 받자마자 끊기도 했다.

총 6번 전화를 했고, 마침내 연결이 되었다.


 교통사고가 났고, 위치가 어디다 라고 얘기하니, 끊으면 누군가 다시 전화할 예정이니 내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여기선 내가 경찰서나 소방서에 장난 전화를 해도 날 찾아와 처벌하지 못할 것이다.


 1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황임을 다시 설명했다. 했던 얘기를 또 하고 있자니, 또 시작이구나 싶었다. 역시 운전자를 그냥 보내는 게 맞았다고 후회되었다.


 땡볕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 사이 경찰차가 몇 번 지나갔고, 그때마다 저 차인가 싶어서 손을 들어 흔들었는데, 다른 용무가 있었는지 지나쳤다. 한 시간쯤 후에 경찰차 한 대에 경찰 세명이 타고 왔다.



 경찰은 내려서 이것저것을 물었다. 영어를 잘 못하시는지 피해자인 나의 사정을 가해자인 운전자에게 물었다.


 경찰은 도로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메모지에 남겼다. 사고 현장을 사진으로 남길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운전자를 그냥 보내는 게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질문이 끝나고 다 같이 경찰서로 이동했다. 내 자전거는 차 트렁크에 싣고, 난 뒷 좌석에 탔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자차로 경찰서로 이동했다. 사고 지점에서 경찰서까지는 15분 남짓한 거리인데, 또 한 시간이 걸렸다. 사고가 두건이라 그것도 확인하고 가야 한다며, 환자를 태우고 다른 현장부터 들렀기 때문이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운전자의 차는 일시적으로 압수되었고, 운전자는 마당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라도 안 아프냐고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경찰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길래 나도 그늘 밑에서 하릴없이 앉아 기다렸다. 또 30분쯤 지났고, 마침내 조사실로 들어갔다. 경찰은 사건 정황, 다친 곳, 연락처 등을 물었고 꼼꼼히 받아 적었다. 사고 시간이 언제냐고 묻길래 아까 찍은 사진의 촬영 시간을 보고 말해줬다. 사건 접수 시간이나 사고 시간을 경찰이 직접 기록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역시 운전자를 그냥 보내는 게 맞았나 싶었다.


 이것저것 자기가 적은 기록을 보여주고 사실 또는 내가 주장하는 바와 틀림이 없다면 서명하라고 했다. 서명했다. 내 자전거도 조사를 위해 압수되었다.


 다 끝났냐? 집에 가도 되냐? 물으니 그러라고 했다. 보호자나 친구를 부르라고 했지만, 괜찮다고 주장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 '나는 어째서 기분이 나쁜가?'를 진중하게 고민해보니, 몸이 아파서 그런 것도 같고, 찢어진 옷이 아껴 입던 거라 그런 것도 같고, 뜻하지 않게 반나절을 날려버린 게 아까운 것 같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썅! 사람이 차에 치였으면 최소한 소독약이라도 바르라고 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고, 경찰서가 아니라 병원부터 가라고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었다. 역시 운전자를 그냥 보내는 게 맞았다. 경찰이 조사를 하고 나중에 연락을 준다고는 하는데, 나한테 도움될 게 뭐가 있나 싶다.


 집에 와서 적당히 씻고, 소독약을 발랐다. 까진 데는 쓰렸고 어깨와 목이 부으면서 서서히 통증이 커졌다. 사고 후 경찰차가 오길 기다리면서 교육원과 협약이 맺어진 의료센터에 문의를 했었다. 상담원은 몰레뽈롤레에는 마땅한 병원이 없으니 수도로 가라고 했는데, 아까만 해도 '귀찮은데 내일 가야지' 했다가 씻고 나서 피가 나는 걸 보니 반창고도 사야 했고 어차피 수도는 가야 할 것 같았다.



 #또 시작이다 2.


 수도 가보로네에 있는 어떤 사립병원으로 갔다. 꽤 규모가 있는 병원이었다. 접수를 하려니 기다리라고 해서 30분, 의사를 만나기 전 혈압, 기저질환 등을 확인하는 사전 문진을 기다린다고 또 1시간, 의사를 만나기까지 또 1시간을 기다렸다. 이럴 줄 알고 읽을 책을 챙겨 오긴 했다. 이럴 줄 알았지만, 정말 번번이 이러면 안 되는 거다.


 의사는 친절했고, 꼼꼼하게 확인했다. 경찰서에서 진단서를 끊어 오라길래 서류를 내밀었고 이것도 잘 작성해 주었다. 진통제를 처방해준다길래, 그 정도로 아프진 않으니 괜찮다고 했다.


 여담이지만, 한국에 있을 때 상처가 나면 습윤밴드를 사다가 붙였다. 테가솝이나 듀오덤 같은 걸 크기, 모양 별로 구비해두고 썼다. 이 습윤밴드라는 건 매우 효과적인 치료제다. 건식 밴드를 붙이는 것보다 효험이 몹시 좋고, 연고처럼 옷에 지저분한 걸 묻힐 일이 없어서 좋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상처가 덜 아프게 하기도 했다.


 의사에게 이런 거 있냐고 물으니 우리 병원 약국에는 없다고 했다. 내 영어가 부족해 그런가 보다 싶어 핸드폰으로 이미지를 찾아 이거 달라고 보여주니 '응, 그래 이거. 우리 병원 약국엔 없고 다른 약국에 가면 있을 거다'라고 했다.


 진단만 받고 아무런 치료나 처방을 받지 않고 나오는데, 4만 원 정도를 썼다. 어차피 보험사에 청구할 거니까 상관없다. 그보다 고작 이걸 하려고 병원에서 3시간 넘는 시간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거의 6시가 다 되었으므로 큰 약국에 가서 밴드를 사려고 서둘렀다.


 큰 쇼핑몰에 있는 드럭스토어에서 찾던 물건이 있어 넉넉하게 샀다. 마감 5분 전이라 경비는 일단 막았지만, 상처를 보여주고 멋쩍게 웃으니 들여보내 줬다.





#누구 잘못일까. 


 먼저, 나에게 잘못이 있다. 후방 주시를 잘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뒤에서 차가 오는 걸 인지했다면 먼저 갈 수 있도록 비켜야 했다. 아예 도로 밖으로 빠지던가, 팟홀을 둘러가기 전에 멈춘 뒤 모든 차가 통행한 것을 확인한 후 이동해야 했다.


 나를 친 운전자는 명백한 운전 기량 미달이다. 자신의 차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고, 주변 교통 상황에 영향을 주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앞에 있는 대상이 보행자인지, 자전거인지, 차인지에 관계없이 접촉 없이 지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야 했다.


 게다가 추월이 금지된 구간이었으므로, 법적으로 차의 대우를 받는 자전거가 추월할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추월할 수 없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고를 유발하지 않는다. 지키지 않아 사고가 났다면 뒤차가 앞차를 들이받은 것과 같다.


 게다가 앞에서 오던 차가 추월하여 중앙선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전방주시를 잘했다면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어 사고를 예방해야 할 책임이 있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며 추월을 했던 놈이 원흉이다. 누구인지, 어떤 차를 몰았는지 기록이 없으므로 아무런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


 경찰은 일을 열심히 했다. 일처리가 미숙하고, 체계적이지 못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본다.


 병원은 일을 열심히 했다. 환자를 기다리게 했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본다.


 누구라고 해야 할까, 도로를 깔고 유지 및 보수하는 놈이 잘못이다. 애초에 아스팔트를 두껍고 튼튼하게 깔았다면 이런 사고는 나지 않는다. 깨진 도로를 제 때에 수리했다면 이런 사고는 나지 않는다. 애초에 도로 폭을 여유 있게 설계했다면 이런 사고는 날 수 없다.




#그래서 누구 잘못일까.


 사고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운전자가 운전을 개같이 해서 사고를 냈다. 이 새끼는 내가 콩밥을 먹인다'였는데, 생각해보니 그리 큰 잘못도 아니거니와 이게 콩밥을 먹을 일인지 아닌지 판단할 지식이 나에겐 없다. 게다가 내 잘못도 있어서 적당히 합의를 보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 같다.


 경찰서와 병원에서는 아픈 몸으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이 옘병할 나라는 이래서 되는 게 없다'라고 욕이 나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일처리가 빠르지 못할 뿐 나름 할 일들을 다 하긴 했다. 한국이 유달리 발달한 것이라고 해두는 편이 좋겠다.



#역시 사람이 문제다.


 어쩌면 도로 자체가 사고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자전거 동호인으로서 무사고 라이딩 경력은 나름의 자랑이었는데, 그동안 사고가 없었던 까닭은 내가 겁이 많아 보수적으로 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경에서는 사고를 겪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인다.

 보츠와나가 개발도상국이라 나라에 돈도 없고, 도로 관리 상태도 안 좋고 그래서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고 얘기하는 편이 속이 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탓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책임을 사회와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하고,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몹시 선호되는 '가짜 분석'이다. 모두에게 책임을 돌리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라느니,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둥 너무나 큰 문제를 엉뚱하게 끌어 옴으로써 본질을 흐린다. 해결하기엔 너무나 크고 어려운 문제를 가져와 '네가 겪은 일은 흔하고, 별 것 아니야'라는 식으로 덮어버릴 뿐이다.


 이 사고는 결국 사람이 낸 것이다. 도로가 어떻고, 경제 사정이 어떻고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보츠와나에서는 도로며, 경찰이며, 병원이며 열악하긴 하다. 이걸 공공시설이라 해야 할지 인프라라고 해야 할지 한 단어로 묶어 내기는 어려운데, 한국의 그것들과 비교하면 조악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은 아니다.

 추월을 한 그놈은 불법하게 운전했고, 나를 친 놈은 기량이 모자랐고, 나는 부주의했다. 처음엔 나도, 나를 친 운전자도 팟홀을 물고 늘어졌지만 그건 핑계다. 내가 피하지 않았고, 운전자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 사람 탓이다.




 여기까지가 이 사건에 대해 내가 이해한 바다. 경찰이 조사 후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모르겠다. 경찰서에서도 도로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할까 봐 걱정이긴 한데, 어쨌든 합의를 보고 끝나게 될 것이다.


 사고 후에 '하... 이런 나라에서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일시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건 성급한 결론이다. 게다가 못돼 처먹은 결론이었다.

 나와 너를 구별 지음으로써 너의 발전 가능성을 무시하는 결론밖에 안된다. 너와 나를 동등한 위치에 놓는다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가 없나. 하면 되는데. 왜 나는 하면서 너는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는가.

 운전 문화가 엉망이라면 운전면허 취득 절차를 강화하고, 운전자를 대상으로 재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처벌을 강화하든, 공익광고를 실시하든 각종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도로가 깨졌으면 고쳐야 된다. 설계 단계부터 제대로 된 도로를 계획하고, 더 나은 공사 기법을 들여야 한다. 응급실에서 환자가 대기하느라 상태가 악화되었다면 병원 시스템을 개선하고,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 어떤 해결책이 최선인지는 내가 감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상황을 개선할 해결책은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언제나 '잘 알지만 사정이 있어서 실시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이런 말이 자주 나오는 건 이게 정답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게 쉬운 결론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모두에게 돌림으로써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사고에 대해서 관련자는 과실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하고, 이에 관련된 직업인들은 제 일을 매끄럽게 처리해야 한다.

 팟홀 따위가 어떻게 사고를 내겠나, 사람이 사고를 만든 것이다.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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