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교육이 필요했어

by 나르는꿈

부모가 현명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오롯이 자식들의 몫이다


내 눈에 콩깍지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건 사십 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 남편이 대박이 되고 내가 쪽박이 되던 그 순간이었다

지극한 사랑이어서가 아니라 결혼하면서 맞닥뜨린 환경에서 남편이 안쓰럽고 불쌍해 보였다

내 고향 부산에서 영원히 살 줄 만 알았는데 결혼하고 오 개월 만에 파견 나왔던 남편은 서울 본사로 발령받아 자취하는 고등학생 시동생과 시누이들과 합쳐서 살다가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내가 무엇을 생각할 틈도 없이 남편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의 보호자이자 나와 내 아이를 합쳐 일곱 명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결혼하고 이년도 안되었다

그때 우리는 방 두 칸 달셋방이었다

시어머니는 시동생 시누이들의 절대적인 방어벽이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해도 남편이 야단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비 없는 애들이라고 홀대하냐고 한탄을 하시니 남편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시아버님이 병석에라도 살아계셔서 집안의 질서를 잡아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두 아이의 엄마인 나의 우선순위는 내 아이들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눈치를 봤었고 그분의 자식들을 염두에 둬야 했었다 시동생을 고등학교 졸업시키려고 아들을 업고 담임선생님에게 용서를 구하러 가기도 했었고

시집갈 때까지 제대로 직장생활 없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던 공주병 만땅이었던 넷째 시누이가 죽는다고 사놓은 알약들을 보고 나는 내 아이를 두고 친정으로 도망도 갔었다

내 아이가 네 살 무렵이었다

툭하면 죽는다고 말로 으름장이라고 세째시누이가 말했던 적이 있었지만 무서웠다

시동생을 포함해 그들이 잘못하면 집에서 눈치 줘서 밖으로 도는 거라고 상냥하지 못한 며느리 탓을 하며 밥상을 거부하는 시위를 하는 시어머니가 두려웠다

사소한 일탈이 그러한데 약을 먹고 사고를 친다면 어쩔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어미란 어떤 경우에도 자식을 두둔하며 감싸는 시어머니를 보고도 나는 나의 두려움만 생각하고 어린 나의 아들을 두고 내 한 몸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즈음 시어머니는 오십 대 중반이었는데 내게는 그 누구보다 상노인이었다

시집식구들 자체가 내게는 제3세계 사람들이었다

어른이 계시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야 집안이 조용했다


둘째가 중학교 이 학년 때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운동신경을 누르고 있어 그 징후를 주위에서 먼저 알아봤었다 아이가 다리에 힘이 없다 팔에 힘이 들어간다 했을 때 그냥 성장통이라고 지나쳤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라 유심히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는 건 자기변명이다 살기 바빴다는 핑계를 자식에게 하는건 최악임을 알아야한다

방학 때 외갓집으로 놀러 갔을 때 나의 동생들이 걷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동네병원에서 ct를 찍고 소견서를 들고 큰 병원으로 가고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머리띠 형태로 스템플러가 박혀 있는걸 나는 차마 바로 보지 못했다

미세하나마 후유증으로 불편한 모습을 볼 때면 힘들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어미가 되어서 왜 방심했는지 왜 그랬는지 왜 내아이에게 더 태만했는지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면 저런 불편 그나마 덜했을 텐데라고 가슴을 할퀸다


둘째와 암병동에서 지내고 있을 때 큰애는 고등학생이었다 한참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엄마로서 나는 큰애의 그때를 기억 못 한다

너무나 슬픈 고백이지만 큰애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계시고 아비가 곁에 있었다 해도 어미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나는 너무나 무심한 어미였다

단 하나 수능 보는 날 항암치료하는 날과 겹쳐 새벽에 병원서 나와 변변찮은 도시락 싸준 기억뿐이다

혼자 외롭지는 않았냐고 늦게 물어보니 동생이 큰 수술을 하고 아프니 학교에서 가끔 옥상에 올라가 혼자 운적은 있다고 웃으며 말하는 내아들

사춘기의 반항 같은 것도 나는 모른다

나의 아들은 혼자서 삭이며 보냈을 것이다

어미로서 해준 게 없는 너무나 뻔뻔한 기억

그걸 이제야 생각한다


쪽박이 되기전에 속빈 뒤웅박은 자신의 분신에게도 해 준게 없다 어먼데 충성하고 닳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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