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집에 가봐야겠어, 내가 그렇게 큰딸 이름을 애타게 불렀는데 연락이 안 된다니 그럴 리가 없어,
아비가 찾는다는데 오지 않을 딸이 아니야.
노인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고 모두가 제자리로 가서 주위가 조용해진 틈에 살며시 일어나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 층에서 일층으로 내려왔다.
밤이 꽤 깊은 거 같은데 뭐가 바쁜지 엘리베이터서 만난 당직자도 서류를 보며 휴대폰으로 통화하느라 노인을 의식하지 못한다.
성가시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며 일층 현관문을 나서니 대문까지 완만하게 마당이 이어져있다.
대문을 나서자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다.
요양병원이니 도심에서 떨어진 외진 곳이리라 짐작해 본다.
이 요양병원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언덕배기에서 내려가는 골목길은 가파르고 사방으로 여러 갈래로 나있다.
노인은 그중 가장 가파르게 아래로 내려가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냥 내려갔다.
아무리 여러 갈래로 나 있는 골목길이라도 내려가다 보면 하나에 만난다 산복도로가 나올 거다.
부산의 지형적 특징상 그건 국률이리라
산복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큰 대로가 나오겠지.
집 찾아가는 길이 두렵지 않다.
예전에 많이 걸어 다니던 노인의 도시가 아닌가,
길을 따라 방향을 잡아가다 보면 항구도시답게 바다가 나올 거고 바다가 보이면 집은 찾은 거지.
집 찾는 건 일도 아니다.
얼마 만에 걸어보나 한적한 이 밤길.
그것도 좁은 골목길도 아니고 훤히 트인 사차선 넓은 대로를 걷는 상쾌함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다.
그런데 큰딸 윤이는 왜 연락이 안 된다는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노인은 사차선 도로에서 휘적휘적 발걸음을 재촉한다.
첫애이면서 아비를 닮은 윤이는 제어미의 화풀이 대상인 것을 노인도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데 모를 수가 없다.
그가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린 뒷날은 대놓고 윤이를 쥐 잡듯 다구치는 아내의 소리를 그는 온몸으로 보고 들으면서도 외면하며 모른 체했다.
불같은 성격의 아내는 잔뜩 주눅 든 아이에게 더 짜증을 내곤 했었지.
목수일이란 게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일하고 나면 함께 일한 인부들과 한잔해야 끝나는 것이었다.
힘들게 일하고 출출하던 참에 그 한잔은 힘든 육신을 업시켜주고 기분도 상쾌해지면서 두 잔 세잔으로 술로 배도 채우고 기분도 채우고 그렇게 혼자 풍만해진 몸과 마음으로 주체를 못 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도 안다. 그의 술주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그 앎이 다음날 아침이란 게 문제인 것이다.
아침이면 큰딸을 닦달하는 목소리의 강도에 따라 안다.
안 들리는 척 잠이 안 깬척하며 뒤척이며 늑장을 부리지만 온몸으로 듣는다.
큰딸은 제어미가 말하지 않아도 제 할 일 하는 아이인데도 어젯밤의 분이 가시지 않으면 아내는 큰딸에게 소리를 높였다.
큰딸의 아침 등굣길의 뒷모습은 늘 어깨가 처져 안쓰러워 보였지.
그는 술주정의 여파를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것뿐이란 게 문제임을 모른다는 게 문제임을 모를 뿐이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야 있겠냐만은 손가락 길이만큼 마음쓰임은 제각각인 건 어쩔 수 없다.
아비를 닮아 애처로운 큰딸
어미를 닮아 당당한 둘째 딸
셋째는 약았다. 아무래도 언니들의 모양새를 보고 느끼는 학습효과가 있는 거 같다.
그 뒤로 또 있는데 막내들은 그냥 두리뭉실 귀엽지 하면서 노인은 혼자 싱긋 웃는다.
지금은 자기를 닮은 큰 딸이 연락이 안 된다 하니 그것이 걱정이다.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닌데. 서둘러 가 봐야지.
밤공기가 이렇게 상쾌했었나.
노인은 허리를 곧게 펴보았다. 요양병원을 빠져나오느라 한껏 움츠렸던 어깨를 살며시 펴 보았다.
상큼한 밤공기만큼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발걸음은 도로를 스치듯 걷는 게 뒤에서 보면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거 같았다.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나, 노인은 날아갈 거 같은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어둠이 잠식한 도로를 휘적이며 걷다가 노인은 옆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렇게 대놓고 큰길을 걷다가 그때처럼 방범이 발견하고 또 잡아 가둘지도 몰라, 되도록 조심해야 해.
얼마를 날듯이 왔을까.
부산항이 보이고 영도다리가 보인다.
노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마나 정겨운 영도다리인가, 이제 집에 다 왔다. 그리운 나의 집.
봉래산 중턱의 집까지 가파른 좁은 골목길을 어느새 지나왔는지 집 앞에 선 노인은 당황했다.
집이 이상하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잠긴 자물통은 녹이 슬어 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쪽문에는 판자로 못을 박아 봉해 놓았다. 창문도 잠겨 있다.
잠들어 불을 꺼 놓은 게 아니라 안에 사람의 온기가 없다. 아내는 어디를 갔나.
대체 집을 얼마나 비워 놓았는가,
노인은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뒷집도 골목 건너 앞집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노인의 집은 싸늘히 식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