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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3장 3화)

3장. 벚꽃, 흩날리다

by 구정훈


3장
벚꽃, 흩날리다


3화, <지금, 다시 시작되는 계절>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간. 방 안은 마치 두꺼운 유리로 외부와 완전히 분리된 수족관 같았다. 바람 한 점, 잔물결 하나조차 허락되지 않은 절대적인 정적. 불 꺼진 창문 너머로는 맞은편 빌딩에 희미하게 켜진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하얀색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야근을, 누군가는 내일을 준비하며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정지되어 있다가, 이따금 아주 작은 움직임이 감지될 때면 꿈속에서 현실을 엿보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연우는 커튼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리모컨을 손에 쥔 채 옆에 누워있는 빛톨을 바라봤다.


“이 영화, 내 인생 영화야. 이거 볼까?”


연우가 고른 작품은 다케우치 유코 주연의 일본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였다. 사실 이 영화는 연우에게 특별했다. 빛톨이 한국에 오면 꼭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품어왔다. 그리고 연우가 그 영화를 고른 데에는, 단순한 취향 그 너머 그녀를 향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시간의 강을 건너 돌아오는 인연, 학창 시절부터 조금씩 쌓여온 두 주인공의 순수한 사랑, 그리고 죽음으로 갈라져도 끝내 서로를 부르는 운명.


연우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쩌면 자신과 빛톨, 두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많은 시간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난 인연. 비록 인생이 그들을 때때로 따로 서 있게 만들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서로의 곁으로 이끈다는 믿음. 그 깊은 그리움과 재회의 기적, 그리움이 결국 서로를 불러낸다는 간절함이 빛톨을 곁에 둔 지금, 더욱 또렷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연우는 영화가 시작하자 빛톨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거 어쩌면 우리 이야기 같아... 그래서 골랐어.”


영화 속 러브스토리는 어느새 현실의 두 사람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광활한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난 인연의 기적, 그 긴 우회의 끝에서 서로를 마주한 사랑은 스크린 너머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새벽의 공기 속에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빛톨은 화면 너머 젖어오는 비의 계절처럼, 시간의 강을 건너 돌아온 연인과 그녀를 기다리던 가족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한참 동안 영화에 집중하며 숨소리 하나 없이 화면을 바라보던 빛톨은, 영화가 중반을 넘기자 어깨를 가느다랗게 떨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연우의 옆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왔지만, 그는 그것이 그녀의 울고 있는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빛톨이 티슈를 계속 꺼내어 눈가를 닦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조금 울다가 그치겠지...'


연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하지만 빛톨의 흐느낌은 그의 품 안에서도 멈출 줄 몰랐다. 마치 오래된 슬픔이 마음의 깊은 고랑을 따라 스며들 듯, 그녀가 느끼고 있는 슬픔이 연우에게 전해졌다.


연우는 조심스럽게 빛톨의 손등을 감쌌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손가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빛톨은 흐르는 눈물을 계속 손으로 훔쳐내며, 마지막 장면이 흐르는 내내 연우의 품에서 조용히 영화를 지켜보았다. 화면이 멈추자, 그녀의 숨결 속에 머금은 슬픔이 연우의 가슴으로 깊이 번져왔다


연우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젖은 뺨이 가슴에 닿는 순간,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그대로 전해졌다. 말없이 그 눈물을 품고 있던 연우의 눈가에도, 어느새 뜨거운 이슬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새벽, 연우는 새삼 깨달았다. 아버지의 흔적을 좇아 머나먼 미국 땅까지 건너가, 세월의 풍랑을 홀로 건너온 그녀. 겉으론 용감하고 단단해 보여도, 이야기 한 줄기에도 너무 쉽게 물들고 울음조차 속으로 삼켜야 했던, 생각보다 훨씬 더 여린 존재였다는 것을.


연우의 품으로 번져오던 빛톨의 흐느낌은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적시다가, 어느새 조심스레 빛을 머금고 수면 위로 가만히 떠오르듯 반짝였다.


그 순간 연우는 깨달았다. 빛톨의 눈물은 오래된 창틀의 금이 간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 같다는 것을. 그 눈물은 보이지 않는 균열을 따라 흘러내리는 절망이자, 오직 내면 깊숙한 곳에서 스며 나온 진실만이 맺을 수 있는, 투명하고도 뜨거운, 하나의 진혼곡이었다.





둘은 그렇게 새벽잠을 설친 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나란히 잠에서 깨어났다.


연우는 오늘은 직접, 빛톨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연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인덕션에 냄비를 올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닫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왠지 그녀에게 그 부드러운 맛을,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스스로를 지켜줄 수 있는 따뜻한 음식을 건네주고 싶었다. 준비하고 있는 그 음식은 연우에게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었고, 몸이 많이 쇠약해진 지금의 빛톨을 지켜줄 수 있는 작은 방패 하나쯤 되어주기를 바랐다.


전날 마트에서 빛톨과 함께 장을 보며, 무심한 척 하나씩 카트에 담아두었던 재료들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연우는 먼저 다시마와 멸치로 간단히 육수를 내고, 순두부를 부드럽게 풀어 올렸다. 그리고 비장의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맛간장에 쯔유를 적당히 섞고, 푸짐하게 다진 대파와 다진 마늘, 물에 담가 아린 맛을 뺀 양파까지 곱게 다진 뒤 조물조물 버무렸다. 마지막엔 화룡점정처럼 참기름과 통깨를 정성스럽게 더했다. 잔뜩 파를 넣은 양념장은 투박하지만 은은하고 깊은 풍미가 배어 있었다.


그렇게 식탁 위에는 소박한 순두부 두 그릇이 올랐다. 하얀 순두부 위로 양념장이 적당히 번지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방안 곳곳에 퍼졌다. 그때 막 일어난 빛톨이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수면 바지를 입고, 멍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한참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이내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우가 자랑하듯 입을 열었다.


“나 어릴 적에 아버지랑 석촌호수 아침 운동을 자주 갔었거든. 운동 끝나면 자전거에 큰 냄비 싣고 순두부 파시는 아저씨가 있었어. 꼭 그 자리에서 한 그릇씩 먹고 집에 가던 기억이 나. 진짜... 너무 맛있었지.”


빛톨은 조심스럽게 순두부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양념 맛에 눈이 조금 커졌다.


“와... 진짜 맛있다. 간단해 보이는데, 엄청 깊은 맛이 나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한결 밝아져 있었다. 밤새 어깨에 들어가 있던 긴장도 툭, 하고 내려앉은 듯했다.

연우가 입안에 있던 순두부를 급히 삼키며 말했다.


“미국 돌아가면 누룽지 그런 거 말고, 이거 꼭 해 먹어 봐. LA 한인마트에 순두부 팩 있잖아? 양념장은 내가 레시피 문자로 보내줄게.”


빛톨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응, LA에는 없는 게 없지. 나도 이렇게 먹어야겠다. 아침을 잘 안 먹는데... 이건 너무 좋다.”


밥그릇이 딸그락, 비워질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고, 전기포트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은 마치 작은 축복처럼 방 안을 채웠다.


커피는 빛톨이 내렸다. 커다란 머그컵에 커피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으며, 그녀는 작은 흥얼거림까지 흘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빛톨이 신이 난 듯 말했다.


“자기야 우리, 그때 같은 아파트에 살았었잖아. 그때 우리 아버지랑 자기 아버지가 알고 지냈다면, 나도 자기를 알았으면... 진짜 재밌었겠다.”


연우가 웃으며 받아쳤다.


“아니지. 그때 나를 봐도 자긴 날 쳐다보지도 않았을걸? 인기 많았던 자기가 나 같은 애를 눈에 뒀겠어?”


빛톨은 고개를 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아니야. 내가 자기를 알았으면, 진짜 많이 귀여워해줬을 거야. 자기는 내 이상형이야.”


연우는 그 말을 듣고 슬쩍 웃더니, 빛톨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하루엔 무게도 그림자도 없었다. 사랑과 진심이 가득 담긴 따뜻하고 편안했던 아침,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내 웃으며 나누는 말들, 창밖으로 흘러드는 햇살까지... 모든 것이 축복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순두부로 속을 따뜻하게 채운 두 사람은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잠실역 근처 피부과에 먼저 들렀다. 병원은 빛톨의 사촌오빠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연우는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며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익숙한 공간에 앉아 흘러간 시간의 자취를 느꼈다. 중학교 옆에 있는 낡은 상가건물은 연우의 추억이 가득 담겨있는 상자 같은 곳이었다.


잠시 후, 가운을 입은 사촌오빠가 나와 인사를 건넸고,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얼굴이 지난번 보다 많이 좋아졌는데? 좋은 사람 생기니 얼굴부터 달라지네.”


사촌오빠가 농담처럼 말했고, 빛톨은 연우의 팔을 끌어안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빛톨이 진료실에 들어간 사이, 연우는 상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오랜만에 마주한 풍경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잠실의 스카이라인은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유년 시절 자주 드나들던 상가는 시간의 흐름을 비껴간 듯 그대로였다. 너무도 익숙해서 낯설고, 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놀라운 그 풍경 속에서, 연우는 오래전 어린시절의 자신과 조우하고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온 빛톨과 함께, 둘은 선글라스를 쓰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가, 내가 다니던 중학교야. 이곳에 오니까 어제처럼 기억이 다 나네.”


연우의 말에 잠시 학교 정문까지 갈어가서 사진 몇 장을 함께 찍었다.


“우리, 진짜 가까이 있었구나.”


그렇게 사진 몇 장을 찍고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방향을 바꾸어 올림픽 공원 쪽으로 걸었다. 지금 함께 걷는 이 골목에서, 수십 년 전 각자의 어린 시절이 비켜 지나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을 울렸다.


“나도 여기 많이 걸어 다녔어.”


빛톨은 연우의 팔에 기대며 말했다.


예전에는 성내역, 지금은 잠실나루역으로 이름이 바뀐 곳을 지나올 때, 빛톨은 발걸음을 늦췄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연우의 팔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응? 왜 그래?”


“여기... 나, 옛날에 무서운 일 당할 뻔한 곳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엔 오래된 공포가 어렴풋이 서려 있었다.


“중학교 때였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가려던 길이었는데, 어떤 청년 둘이 다가와서 ‘아까 어떤 아저씨랑 말다툼하지 않았냐’고 했어. 그 아저씨가 쓰러졌대. 나도 경찰서 가야 한다고.”


“나는 그런 일 없었으니까 그냥 말하면 되겠지 싶어서 따라갔어. 근데, 이상했어. 방향도 이상하고... 결국 아파트 옥상까지 가게 됐어.”


빛톨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둘이... 날 강간하려고 했어. 내가 소리치니까 ‘조용히 안 하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했어. 근데, 진짜로 있는 힘껏 소리 질렀거든. ‘살려주세요!’ 하고... 그 소리가 아파트 전체에 울려 퍼졌어. 다행히 그들이 도망쳤지.”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연우는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난 그날 이후, 혼자 걷는 게 너무 무서웠어. 여기를 다시 걷게 될 줄은 몰랐지.”


연우는 빛톨의 이야기에 기가 막혀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치 몸 어디선가, 끓어오르는 피가 가슴을 찢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마음속으로 ‘정말 아무 일이 없어 다행이다’라고 마음을 쓸어내리며, 빛톨의 떨리는 손을 더 세게,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연우의 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세상에서 귀하고 존엄한 존재였을, 아직 세상의 무서움과 두려움이 뭔지도 다 알지 못했을 그 여린 소녀에게 세상이라는 이름을 한껏 위장한 괴물들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 꽃같은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으려 했던 그 사람들. 사람의 목숨, 사람의 마음, 그 모든 것을 누군가는 그렇게나 쉽게, 그것도 대도시에서 악의의 손을 함부로 뻗을 수 있다는 세상이 기가 막혔다.


연우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더러운 욕망, 힘없는 인간의 존엄을 함부로 보고 무너뜨리는 폭력. 빛톨은 아무도 없는 아파트 옥상에서 그 밤, 얼마나 무서웠을까. “살려 주세요!”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 작은 몸, 떨리는 목소리, 짓눌린 두려움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을...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도 못할 인간의 탐욕 앞에서, 소중하고 연약한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둠이 지금까지도 빛톨의 내면을 옭아매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연우는 혀끝을 깨물고, 분노로 눈을 질끈 감았다.


빛톨에게 남겨진 트라우마가, 이렇게 다시 돌아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연우는 빛톨의 손을 마치 그날 그녀가 살기 위해 절박하게 소리치고 자신을 붙들길 바랐던 것처럼, 더 세게 빛톨의 손을 잡았다.


‘내가, 다시는 그런 어둠이 자기를 덮지 못하게 할 거야.’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올림픽공원까지 걸어갔다. 올림픽 공원 남문 앞에 다다르자, 한창 공사 중인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높은 펜스 너머, 바로 저곳이 빛톨과 연우가 서로를 모른 채 학창 시절을 보냈던 재건축이 한창인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어쩌면 몇 번쯤 마주쳤을지도 모를, 지나쳐버린 미완의 이야기들이 그곳을 걷는 발걸음마다 떠올랐다.


“자기, 여기 이 상가 맨 위층에 독서실 있었던 거 알아? 나 거기서도 공부했었어. 어느 날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소지품 검사했는데, 내 가방에서 치약이랑 칫솔이 나왔거든. 독서실 다닌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위험하다고 다니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어머니에게 말 하더라고.”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선생님의 과잉 간섭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 선생님, 좀 상당히 많이 오버하는거 같은데. 혹시 자기 좋아했던 거 아냐?” 말끝을 흐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빛톨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하나 손가락을 가리키며 풍경을 둘러봤다.


“여기... 테니스장 아직도 있네. 그때 나 테니스도 배우러 다녔었는데.”


그때, 빛톨이 잠시 멈칫했다. 공사장 울타리 너머 주차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주차장에서... 나 잠시 모델 일 할 때, 회식 끝나고 집까지 바래다준 PD가 있었거든. 주차장에서 갑자기 나한테 같이 자자고 해서, 바로 소리 지르고 차에서 내렸어. 저기서 경비아저씨가 오니까 그 사람이 그냥 도망가더라.”


빛톨의 목소리가 다시 가볍게 떨렸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음 장소, 또 그 다음 공간을 기억 속에서 하나씩 꺼내 놓았다. 연우는 그 곁을 묵묵히 걸으며, 빛톨의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품었다.


빛톨은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간판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테니스장 너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공사장 울타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낡은 먼지와 함께 그녀의 오래된 두려움마저 어루만지는 듯했다.


연우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 곁에 발을 맞추며, 그저 마음 어딘가 깊은 곳에서 빛톨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딘지 모르게 차오르는 분노와 안타까운 감정을 꺼내지 못한 채 품고만 있었다.


아름다웠기에, 눈에 띄었기에, 학생 시절부터 또래보다 성숙해 보였기에, 왜 사랑과 존중 대신 상처와 공포가 그녀를 더 자주 따라다녀야 했을까. 그건 단지 몇몇 나쁜 사람들의 일이 아니었다. 이 사회가 수없이 반복해 온 구조적 무심함, 자신의 위치와 힘으로 타인의 감정이나 운명을 함부로 해도 될 것 같은 행동들, 소녀의 울음보다 욕망이 더 쉽게 용서되던 지난 세월들의 반영이었다.


연우는 가슴 깊이 말할 수 없는 분노를 삼키며, 빛톨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녀는 그가 함께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원을 마주한 베트남 음식점에서 가볍게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택시에 올랐다. 연우가 석촌호수를 제안한 건, 잠실에 온 김에 꼭 들르라던 후배의 말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석촌호수에 지금 벚꽃이 지금 한창이라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석촌호수는 이제 막 절정에 들어선 벚꽃으로 하늘이 가득 덮여 있었고, 산책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꽃잎 아래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흐드러진 꽃잎들 사이로 흩어지는 빛, 그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그 장면은 마치 동화를 그려낸 영화의 한 컷처럼, 두 사람을 그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인파 속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걸었다. 사람들이 정말 많았지만, 둘만의 공간처럼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연우는 사진을 찍었고, 빛톨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같이 셀카를 찍을 때면 빛톨은 연우보다 항상 조금 키를 낮춰 포즈를 취한다. 언제나 똑같이...


연우가 사진을 찍으면서 말했다.


“자기는 사진을 찍을 때 왜 항상 나보다 낮게 앉아?”


빛톨은 웃으며 화답했다.


“자기가 더 커 보이니까. 든든하잖아. 그리고 사진도 더 잘 나올걸?”


산책길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서, 두 사람은 호숫가에 자리한 작은 카페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호수와 사람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빛톨이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여기 정말 좋다. 예전엔 오고 싶어도 혼자선 차마 걷지 못했던 길이었거든. 근데 오늘은, 자기랑 처음으로 같이 걸었어. 아마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


연우는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가슴에 새기듯 되뇌이며 빛톨에게 말했다.


“기억은 늘 제자리에 있는데, 같이 걷는 사람이 자기니까 이 길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네. 이상하지? 난 이 길을 수도 없이 걷고 뛰고 했지만, 오늘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걸었던 적은 처음이야. 나도 마음 한쪽이 좀 나아진 것 같아.


“우리, 부탁해서 같이 나오는 사진 찍자.”


빛톨이 일어서며 말했다. 빛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벚꽃 아래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던 여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휴대폰을 건네며 부탁하자, 여학생들은 환하게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말끝에 작은 감탄을 덧붙인 여학생들은 포즈를 잡으라는 시늉까지 하며 적극적으로 찍어주기 시작했다.


“자, 한 번만 더! 이번엔 서로 얼굴 좀 더 가까이 해보세요! 아, 좋아요~!”


빛톨은 살짝 수줍은 듯 웃으며 연우를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연우도 자연스럽게 어깨를 빛톨 쪽으로 기울였다.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머리 위로 벚꽃잎이 흩날렸다. 사진을 찍는 순간마저 봄의 풍경이 완성해주는 것 같았다. 몇 장을 찍고 난 후, 여학생들이 환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사진 진짜 잘 나왔어요! 인생샷이 될거에요!”


빛톨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며, 마치 한 장의 엽서처럼 담긴 두 사람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응, 오늘을 남겼네... 아주 예쁘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 빛톨은 연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붙잡는 빛톨의 손에서, 연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오늘, 과거의 그림자와 함께 걸었고. 스스로 그 어둠을 지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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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에세이,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7.1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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