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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3장 2화)

3장. 벚꽃, 흩날리다

by 구정훈


3장
벚꽃, 흩날리다


2화, <그녀의 선물>



사흘 동안 두 사람은 거의 숙소를 벗어나지 않았다. 식사를 위해 잠시 외출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들은 바깥세상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일상 속에서 머물렀다.


그곳의 시간은 분침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빛톨은 여전히 깊은 피로에 잠겨 있었다. 시차 때문이라기엔, 그것은 너무 오래된 피로처럼 보였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지쳐버린 사람의 움직임. 그녀는 종종 소파에 기대 잠들었고, 가끔은 새벽녘 문득 깨어나 창가에 서서 불 꺼진 도시의 불빛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녀가 소파에서 깜빡 잠이라도 들면, 연우는 그녀 옆에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그녀가 편히 기대어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었다.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봐 주었다. 창 밖을 보고 있는 그녀의 침묵마저도, 그들 사이에선 대화였으니까.


낮에는 조금씩 서로의 이야기들을 꺼냈다. 특히 빛톨은 연우의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궁금함이 많았다. 그 사람을 알려면 주변을 봐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이미 미래를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아직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빛톨은 지난 자신의 지나간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 시작했다. 빛톨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살아온 장면들이 마치 먼지 낀 사진처럼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시절의 상처, 헤어진 연인에 대한 미묘한 감정, 그리고 사랑 앞에서의 서투름. 빛톨의 이야기는 주로 그런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웃음은 짧았다. 마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웃는 듯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종종 무심히 연우를 오래 바라보다가 갑자기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 짧은 시선 속에는, 하지 못한 말들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듯했다.


연우는 이내 알아차렸다. 그 안에는 가볍게 꺼내놨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걸. 연우는 그녀의 이야기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진 새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어디에도 상처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연우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가 어떤 사람을 좋아했고, 무엇에 대해 실망하고 아파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모든 조각들이 지금의 빛톨을 어떻게 빚어냈는지에 알아가기 시작했다.


연우는 사실, 빛톨이 과거의 연인들에 대해서만큼은 침묵할 거라 생각했었다. 굳이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건 어딘가 불편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당연하게 연우도 알아야 한다는 듯, 먼지 낀 추억 상자를 꺼내 연우에게 하나씩 기억을 공유해 주었다.


그 속엔 어떤 감정들이 들어 있는 듯했지만, 분명 그 감정에 실리는 무게는 없어 보였다. 이미 끝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듯, 그녀는 하나씩 그 시절을 되짚어갔다. 연우는 그녀가 말하는 그 남자들이 특별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지난 시절 누구를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연우는 이상할 만큼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진심으로 궁금했던 것은, 그 모든 시간 속을 지나온 그녀 자신이었다.


그 시간 속의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무엇을 꿈꾸고 무엇에 아파했는지를 더 궁금해했다. 연우가 바라본 건, 과거의 누군가가 아니라 그 시간에 존재했던 그녀의 그림자였다.


연우가 마주한 것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깊은 그녀의 과거였다. 손에 닿을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녀가 살아냈던 시간들이었다. 조금은 서툴고 어설펐을지라도 그 순간순간의 사랑이 지금의 그녀를 만든 조각들이라는 것을 연우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부터, 연우의 마음에는 끝나지 않는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빛톨의 말투와 눈빛은 늘 부드럽고 진심처럼 느껴졌지만,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이상하리만치 갑작스러운 끝맺음들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연애는 대부분 짧았고, 대부분은 깊어지기도 전에 끝나버린 관계들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그녀의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하며 매듭지어진 것이었다.


연우는 그것이 단순한 선택이나 성격이라고 넘기기엔 어딘가 낯설고 반복적인 패턴처럼 느껴졌다. 마치 관계가 일정한 온도에 다다르기 직전, 스스로 감정을 끊어내는 본능적인 반사작용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상처가 닿기도 전에 먼저 등을 돌려버리는 사람이 아닐까.'


연우는 그 말들 사이에 숨어 있는 불안을 감지했다. 그녀의 내면 어딘가엔, 애써 무심한 듯 이야기하는 직접적인 회피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감정을 나누는 방식에는 어딘지 모를 ‘거리두기’가 묻어나는 듯했다. 연우는 사실 회피형이나 나르시시스트 같은 인간관계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밀당을 싫어하고 애정표현이 많은 연우에게 그런 성향의 연인은 그에게 언제나 상처만을 주었으니까.


연우는 빛톨의 감정을 또렷이 정의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와의 사랑이 조금씩 더 깊어지는 지금, 자신이 그녀보다 한 발 먼저, 앞서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전에 경험이 있었던 연우는 그 차이를 억지로 좁히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멈춰 설 땐 함께 멈추고, 조심스레 발을 내딛을 땐, 옆에서 천천히 걸어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어쩌면 그녀와의 사랑은, 그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주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감하면서...


연우는 그 밤, 마음속으로 이 사랑이 영원하길 기도했다.

'이번에는, 서로 어긋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그녀의 마지막 남자가 자신이 되기를...'




셋째 날 아침. 그녀의 표정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빛이 마주친 순간 연우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좀 나가볼까?”


그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 빛톨은 환하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빛톨의 설레는 눈빛이 먼저 대답을 건넸다.


사실 두 사람은, 그녀가 한국에 오기 전부터 몇몇 가고 싶은 장소를 함께 정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연우가 건넨 제안은 단순한 두 가지였다.


첫째, 마트에서 장을 보기. 그리고 둘째, 가까운 서점에서 데이트를 하기.


특히 서점은, 연우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장소였다. 빛톨을 만나기 전부터 헤어진 연인을 잊으려 노력하던 시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연을 예감하며 서점의 복도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주칠 자신의 연인을 상상하며 그 시기를 버텨냈기 때문이었다.


책장 사이를 걷다,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그 오랜 예감의 잔상이, 오늘 비로소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연우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너무 좋아. 내가 먼저 씻을게."


빛톨은 연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뒤, 욕실 안에서 물소리와 함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이번에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Billie Eilish의 ‘Birds of a Feather’였다.

그녀는 이 노래의 가사의 의미를 알고 있는 걸까. 연우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더라도 너랑 함께할 거야"라고 속삭이듯 이어지는 그 노래의 가사. 그건 노래 멜로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을 닮은 고백처럼 들렸다.


연우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도 모르게, 그 노래의 리듬에 맞춰 그녀의 감정에 스며들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서며, 보채듯 말했다.


“자기도 빨리 씻어.”


연우는 빛톨과 바통을 주고받듯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안은 그녀가 남기고 간 바디워시 향으로 가득했다. 달콤하면서도 은근한 향이 김이 서린 욕실 안을 감돌았다.


연우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마치 그녀의 체취가 아직 이 공간에 머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음악을 틀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자주 들었던 에어 서플라이의 메들리를 재생했다.


익숙한 멜로디가 욕실 벽을 타고 퍼져나갔고, 연우는 그 익숙한 선율 속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빛톨은 연우의 몸을 살펴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역시 자기는 어깨가 예술이야"


욕실에서 나온 연우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빛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짧게 화장을 마친 뒤, 눈썹 정리 칼을 꺼내 들고 연우에게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봐.”


빛톨은 조심스레 연우의 턱을 들어 올리고, 정성스럽게 눈썹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오래된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다정했고, 연우의 뺨에 간간히 닿는 빛톨의 손끝의 감촉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에 전해졌다. 곧이어 선크림을 손에 덜어내 연우의 얼굴에 톡톡 두드리듯 발라주었다.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려면, 피부관리를 잘해야 해.”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손길 안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배려와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컬링 에센스를 덜어내 그의 머릿결을 정리해 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남자인 연우를 바깥세상에 내보이기 전 마지막 터치를 더해 작품을 완성하려는 듯 보였다.


빛톨은 옷장 문을 열고, 걸어둔 옷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꺼낸 건, 노출이 많은 미국식 파티 드레스였다. 연우는 놀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톨은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드레스를 옷장에 다시 걸고는 짧은 치마를 꺼내 들었다.


연우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그녀도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고민하던 빛톨은, 이번엔 캐주얼한 바지를 꺼내 연우에게 보여주었다.


그제야 연우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여긴 한국이야. 너무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아”


빛톨은 장난스레 눈을 굴리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앞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드레스코드로 조정하겠습니다.”




쇼핑백을 들고 근처 마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쇼핑백을 들고 근처 마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적당히 흐려진 햇살이 구름을 뚫고 거리 위에 차분하게 깔려 있었지만, 아직은 쌀쌀한 4월의 기운과 바람이 그들을 감쌌다.


약간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마트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연우는 카트를 끌었고 빛톨은 앞장서서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파프리카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어 올리길 몇 번. 당근 코너 앞에서는 “이건 꼭 먹어줘야 해”라고 말하곤 망설임도 없이 한 덩이를 집어 들었다.


무언가를 고를 때마다 카트 안은 빛톨의 손길로 채워졌고, 그녀는 가져가야 할 짐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는지 계속 바쁘게 움직였다.


“자기 입에 들어갈 건데, 아무거나 고를 순 없지.”


그 한마디에 연우는 묘하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빛톨은 식재료를 고른다기보다는 생각해 둔 두 사람의 하루를, 저녁의 식탁을, 그리고 함께할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트 안의 음악에 발걸음을 맞추듯, 빛톨은 고개를 까딱이거나 리듬을 타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계산대로 향하기 전, 시식 코너 앞에서 그녀가 연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떡갈비 두 조각을 집어 들더니, 하나는 자신의 입에 넣고, 나머지 하나는 망설임 없이 연우의 입으로 가져다주었다. 연우는 그저 맛만 보고 돌아설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떡갈비 한 봉지를 집어 카트에 넣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빛톨은 시식을 하면 반드시 사야 한다는, 남의 친절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카트를 밀고 서 있던 연우의 손등 위로, 빛톨의 손이 살며시 겹쳐졌다.


“자기야, 오늘 저녁은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연우는 카트 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한국에 오기 전, 연우에게 해주고 싶은 요리를 하나하나 SNS에 올리며 설레던 빛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요리 솜씨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연우는, 카트 안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거... 그냥 다 데워서 먹으면 되는 거잖아.’




생각보다 물건이 많았다. 배달할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곧장 서점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직접 들고 가기로 했다. 쇼핑백은 세 개를 들고 왔다. 연우는 쇼핑백 두 개에 물건을 모두 담아 자신이 들고 갈 생각으로 정리했지만, 빛톨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는 내가 들고 갈게.”


그녀는 자연스럽게 세 번째 쇼핑백에 물건을 나눠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짐이라도 함께 나누고 싶은, 그녀의 배려이자 다정함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한 뒤 다시 외출하려던 순간, 빛톨이 “잠깐만” 하고 연우를 멈춰 세웠다. 옷장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며, 서랍을 뒤적이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얇은 목도리 두 개였다. 하나는 은은한 녹색, 다른 하나는 따뜻한 주황색이었다.


그녀는 녹색 목도리를 연우의 목에 다정하게 둘러주었다.


“자기가 보내준 사진에 목도리가 너무 잘 어울리더라고. 그래서 자기 거 하나 챙겨 왔어.”


그 말에 연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목에 감긴, 부드럽고 얇은 천의 감촉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느꼈다. 따뜻한 마음 하나가 목덜미를 감싸 안는 듯한 순간이었다.


“이거, 자기한테 정말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빛톨은 연우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더니, 스스로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연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이 외출할 때마다 빛톨은 늘 연우의 팔을 자신의 가슴 쪽에 꼭 끌어안았다. 마트에서 쇼핑백을 들고 있을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언제나 연우의 팔짱을 끼고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함께 걷는 시간이 더는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팔에 전해지는 체온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한 다정하고도 단단한 동행이었다.


숙소에서 나와 교보문고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두 사람은 다정히 팔짱을 낀 채, 강남역을 지나 교보문고로 향했다. 마치 이 도시의 일상이 그들을 스쳐가는 것처럼, 익숙한 거리 풍경 속에서 둘만의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교보문고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향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곳에는 오직 이 공간에만 머무는 향이 있었다.

처음엔 베르가못과 레몬이 섞인 듯한 상큼함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왔고, 곧이어 은은하게 퍼지는 유칼립투스와 허브의 향, 그리고 나뭇결을 막 깎아낸 듯한 피톤치드의 숨결이 서점 깊은 곳에서 천천히 퍼져 나와 그들의 숨결에 스며들었다. 그 향은 두 사람의 긴장과 고단함을 천천히 풀어주는, 마음의 공간 하나를 내어주는 환대처럼 느껴졌다.


교보문고의 그 향기는 빼곡한 책 냄새와 섞이며 깊고 푸른 숲을 떠오르게 하는 도심 속의 쉼터를 연상케 한다.책을 꺼내 들면 코 끝을 살살 자극하는 책에서 삼나무와 소나무의 잔잔한 잔향이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책과 향기는 머무는 사람의 숨결에 녹아들며, 이곳이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임을 알려준다.


빛톨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책 냄새가, 나무 냄새랑 섞여서 무슨 숲 속 도서관 같은 느낌이야.”


평소 향기에 관심이 많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오면 항상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밖으로 나가기 싫을 정도로..."


빛톨과 연우는 깊은 향기 속에서 편안해진 마음으로 책을 고르고, 둘 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빛톨은 친구인 가인이 딸에게 줄 영어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직업이 강남의 유명학원의 영어 강사였고, 미국에서는 18년이나 산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 구사를 하는 수준이었기에 묵묵히 그녀가 어떤 책을 고를 것으로 생각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빛톨은 그런 연우에게 어떤 책이 좋을지 선택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연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오래전 뉴욕 유학 시절에 사두었던 '어린 왕자' 동시 번역판을 꺼내 들었다.

영어 실력은 예전만 못했지만, 어린왕자 책은 여전히 손에 익었다.


“생텍쥐페리의 문장은 단순하면서도 시적이야. 단어 하나하나를 외우기보다는, 문장 전체를 감정처럼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하지. 단문이 많아서 중학생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데, 그 안에 담긴 표현은 의외로 깊고 고급스러워. 영어는 단어나 문법에 집착하기보다는, 전체 문장을 감각적으로 익히는 게 훨씬 빠르고 오래가. 특히 '어린 왕자'처럼 문맥이 맑고 은유가 분명한 책은 정서에도 좋아.”


연우는 책을 빛톨에게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도, 중학생이잖아. 기억력이 제일 좋은 나이야. 몇 번 반복해서 읽으면... 아마 이 책 한 권쯤은 통째로 외울지도 몰라. '어린 왕자'를 외운다면, 그보다 더 좋은 영어 공부는 없을 거야. 그리고 문학을 만나는 일이니까, 정서적으로도 분명히 좋은 경험이 될 테고.”


빛톨은 공감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책을 받아 들었다. 마치 자신이 어릴 적 품고 있던 상상력이 다시 손에 닿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린이 책 코너 한켠에 자리 잡고는, 빛톨은 어린 왕자 첫 장에 사랑이 가득 담긴 인사말을 써 내려갔다. '이 책은 이모부와 이모가 함께 골라준 선물이야'라는 글을 덧붙였다. 또박또박 이쁜 글씨체로 글을 써 내려가는 그녀의 손끝에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딸에 대한 향한 애정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인사말을 다 쓰고 나자, 빛톨은 연우의 팔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이제 자기 책 보러 가자.”


그녀의 맑은 목소리와 웃음엔 마치 아침 햇살이 스며든 듯한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연우는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빛톨이 이제는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안도감과 행복한 감정이 밀려왔다.


연우는 빛톨과 함께 에세이 서가 앞에 섰다. 책 등을 따라 시선을 옮기더니 몇 권의 책을 들춰보았다. 그리고는 몇 권의 책을 골랐다. 그가 처음 쓰기로 마음먹은 장르는 산문과 에세이 그 어디쯤 되는 책이었다.


연우의 마음 한켠엔 오래전부터 품어온 ‘소설’에 대한 갈망이 있었지만,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 소설이라는 깊고 넓은 바다로 바로 뛰어들기보다, 자신의 문장을 더 단단하게 다듬고 싶었다. 짧지만 정확한 문장. 정직하고, 사유가 깃들며, 감정이 잔잔히 스며드는 문체. 연우는 그것을 원했고, 그 출발점으로서 에세이를 선택한 것이었다. 연우는 지금, 자신만의 첫 문장을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연우의 북쇼핑이 끝나자, 빛톨은 조용히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였다.

그 책은, 그녀가 미국에 있을 때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했던 책이었지만, 마음이 여린 그녀에겐 단 몇 장을 넘기는 것도 벅찬 책이라고 연우에게 말했었다.


연우는 그녀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건, '그 서사의 상처가 자신의 오래된 고통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오기 전, 그녀는 몇 번이나 연우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나 한국에 가면, 이 책은 자기가 나 대신 읽어줘. 나는... 그냥, 자기 목소리로 듣고 싶어.”


그 말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게.”


빛톨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날 저녁은 숙소에서 먹었다. 빛톨이 정성껏 만든 계란찜, 구수한 된장찌개, 그리고 그녀의 손길이 하나둘 더해진 작은 반찬들. 소박하지만 따뜻한 음식들이 식탁 위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요리를 좋아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솜씨를 내보이길 좋아했던 건 오히려 연우 쪽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녀의 요리를 받아먹고 싶었다. 연우의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식탁도 음식도 아닌, 오직 그녀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와... 정말 맛있다.”


연우가 감탄하듯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주부 경력 몇 년인데. 자기 해주려고 레시피 많이 준비해 왔어.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 자긴 항상 너무 빨리 먹더라.”


그 말에 연우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평소처럼 허겁지겁 먹던 습관을 천천히 고쳐, 빛톨의 식사 속도에 조심스럽게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한 입, 또 한 입. 그녀가 직접 준비한 음식이 입 안에 오래 머무는 만큼, 그녀의 마음도 천천히, 오래도록 머물러 주기를 바라면서.


식사를 마치고, 연우는 빛톨이 치우기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빛톨이 황급히 뒤따라오며 말했다.


“자기야, 내가 할게.”라고 말리려 했지만, 이미 두 손 가득 식기세제 거품을 품고 있는 연우를 더는 말릴 수 없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선 채 연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거실 탁자 앞에 앉아 여행 가방을 열어 무언가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줄 선물들이었다.


포장지에 정성스레 감싼 선물 꾸러미들, 여러 개의 사탕 봉지들, 메모지와 스카프. 연우는 처음엔 그 장면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친구들을 챙기려는 그녀의 다정함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탁자 위에 늘어놓은 것들 사이에서 눈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약간 낡은 포장지로 보이는 영양제 몇 세트. 그건, 그녀가 스스로 복용하기 위해 사둔 영양제들로 보였다. '선물이었다면 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새 포장 지였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연우의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녀는 왜 자신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까지 다 꺼내놓고 있는 걸까. 왜 이렇게 많은 것을 나눠주려 하는 걸까.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주고 작별이라도 준비하듯이...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거품이 흐르는 그릇을 헹구면서, 동시에 마음속에 떠오른 그 물음을 삼켜야 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하나둘 선물이 쌓여가는 걸 보며,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무언가 설명되지 않는, 하지만 또렷한 불안이 가슴 언저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날 밤, 연우는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빛톨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미처 지워지지 않은 어둠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연우의 마음속엔 하나의 바람이 솟아올랐다.


‘그녀가 모든 것을 주고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녀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아야 해.’


만약 그녀의 불안과 슬픔을 내가 안아줄 수 있다면, 그녀가 언젠가 모든 어둠을 털고 일어서는 날, 그 곁에 내가 서 있기를... 연우는 그렇게 기도하며, 천천히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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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에세이,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7.1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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