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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3장 1화)

3장. 벚꽃, 흩날리다

by 구정훈



3장
벚꽃, 흩날리다


1화, <너의 그 아침>


연우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채 빛톨이 깰까 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방 안은 아침빛으로 환하게 물들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그녀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창밖에서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아득히 멀게 들려왔고,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시간을 조금씩 밀어냈다. 그 미세한 소리마저도 희미하게 멀어진 듯,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빛톨은 연우 쪽으로 몸을 살짝 기대고, 길고 낮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을 내려놓은 이가 안도의 호흡을 이어가는 듯, 편안하고 맑은 얼굴이었다.


연우는 그녀의 숨결이 가슴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숨을 조심스레 골랐다. LA에서 16시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온 그녀의 평온을 깨트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눈을 뜨면 곧바로 마주할 그녀의 눈빛을 기대하는 마음이 연우의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교차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연우에게 흔들림 없는 약속이자 삶에 새겨진 사랑의 고백이었다. 연우는 그녀의 고른 숨결을 들으며, 이 평온한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다.


사랑이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믿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 아침을 곁에서 지켜주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이상적인 꿈이나 화려한 말이 아니라, 편히 잠든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설레는 아침을 맞이하고, 그 마음을 담아 하루를 시작하는 것임을 연우는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보며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얼마만일까, 그녀가 이토록 아무에게도 쫓기지 않는 숨을 허락받은 밤은...


잠든 그녀의 손이 밤새도록 자신의 허리에 얹혀 있었고, 그녀의 체온은 광활한 어둠을 건너온 빛의 여운처럼 연우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빛톨의 얼굴을 바라보던 연우는 문득 어느 밤을 떠올렸다. 비가 내리던 날, 달빛조차 닿지 않던 그 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가 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지금 빗소리 들려?'

"아니, 잘 안 들리는데..."

"잠깐만, 내가 영상으로 보내줄게."

잠시 후, 그녀가 보내온 영상에는 우산을 들고 집 앞 도로를 걸으며 찍은 장면이 담겨 있었다. 우산 위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비에 젖은 LA의 흙냄새가 무음의 언어처럼 연우의 마음을 채웠다.


그날 그녀는 마치 자신의 얼굴과 마음을 빗속에 담아 연우에게 건네듯 그렇게 영상을 보냈다.

연우는 그 마음을 받았다. 그날 밤 한 줄의 문장을 적어 빛톨에게 보냈다.


지금
나는 너의 마음을 듣고 있어

빗방울에 섞여 건너온 네 마음이
너에게 닿고 싶은 물결을 만들고 있어

낯선 도시를 걷고 있는 너의 숨결
네가 지나온 하루의 모든 순간이
지금 내 안의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

빗방울 같은 너의 작은 발자국 소리가
이 밤 내 창을 두드리고 있어

나는 지금
네가 사는 도시의 비를
너와 함께 맞고 있어

내 마음도 그 비를 따라
너의 발자국을 따라
너에게 흐르고 있어


LA에서 그 비를 건네던 사람이 지금 연우의 품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 방은 더 이상 영상 너머를 상상하던 공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비를 닮은 기억 속의 존재가 아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연우는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빛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녀의 숨결이, 이 평온이, 이 계절이 한순간이라도 더 오래 내 곁에 머물러 주기를...'




빛톨이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새어든 아침 햇살이 방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이 창가를 바라보려고 하다가, 눈이 부신 듯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얼굴을 어루만지듯 내려앉은 햇살, 솜털보다 가벼운 이불 사이로 전해지는 서로의 체온, 그리고 바로 곁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숨 쉬는 한 사람. 그녀는 몸을 돌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상상 속에서 보던 사람을 현실에서 처음 마주한 것처럼, 여전히 기억과 현실을 오가는 듯,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연우도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는 전화기 너머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곁에 있는 사람을...


빛톨은 이불속으로 얼굴을 묻었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 포근한 감촉 속에서 자신이 진짜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처럼.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밀어 노트북을 다리 위에 올려 글을 쓰고 있던 연우의 얼굴을 몰래 바라보았다.


빛톨은 이불속으로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연우를 바라보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 이대로 행복해도 돼?’라고 묻는 듯한 몸짓이었다. 연우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빛톨은 상체를 일으켜 그의 등에 자신의 볼을 붙이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연우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호흡이 섞였다. 이 순간의 영원을 두 사람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빛톨은 더 이상 거리를 두지 않았다. 팔에 힘을 주며 더 단단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연우는 무심한 듯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녀에게 등을 내어주었다. 빛톨은 그의 어깨너머로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위로 쌓여가는 문장들은 둘의 첫 만남을 담고 있었다.


"이거 우리 이야기야?"
연우가 부끄러운 듯 노트북을 덮고 그녀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깨있었어? 자기 안 피곤 해? 나 코 안 골았어?”


연우는 살짝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피곤하지 않아. 자기 코는 조금 골더라.”


“창피해~”


"아냐, 정말 귀여웠어. 코 고는 소리가 자장가 같아서 덕분에 편히 잤어."


빛톨은 그의 등에 이마를 다시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연우의 다정한 마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 씻고 올게."

빛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연우는 방 안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방 안을 채우던 침묵은 아주 천천히, 일상의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내 샤워기의 물줄기가 바닥에 빗소리처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위로 ‘에어 서플라이’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빛톨의 목소리가 연우의 귀에까지 번져왔다. 그것은 마치 이방인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이곳을 자신의 자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부르는 안도의 노래처럼 들렸다.


연우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이 평범한 아침이야말로 가장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적임을 새감 깨닫고 있었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렸고,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욕실에서 나온 빛톨이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을 어깨 위로 흘리며 나왔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드라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이 저음의 진동처럼 방안에 낮게 울렸다. 습기를 머금은 머리칼 사이로 샴푸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졌고, 그 향기는 연우에게 그녀의 체취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드라이기 소리가 멎자 방 안에는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빛톨의 존재를 머금은 향기가 집안 공간 곳곳을 채우며 그녀의 흔적을 짙게 새겨놓았다.


연우는 빛톨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제야 이 공간이 진정 두 사람의 ‘함께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방 안을 감싼 그녀의 향기와 숨결은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기적처럼 연우의 심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머리를 다 말린 빛톨은 헤어롤 몇 개를 가볍게 말아 올리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파우치를 열었다.

거울 너머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미뤄둔 일상을 이제야 하나씩 되찾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우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킨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바닥의 리듬, 파운데이션이 얇게 깔리는 하얀 피부, 반쯤 감긴 눈꺼풀 위로 브러시를 움직이는 그녀의 길고 얇은 손가락. 그것은 화장이 아니라, 닳아 없어진 마음의 모서리를 매만지고, 어딘가 부서져 있던 자신을 차근차근 복원하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연우는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걸리는지',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이 시간을 존중하고,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조급함 없는 그의 시선은 따뜻했고, 그런 그의 배려 속에서 빛톨은 천천히 자신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거울 너머로 보던 빛톨이 의아한 듯 연우에게 말을 건넸다.


“자기, 지루하지 않아?”


연우는 잠시 거울 속의 빛톨과 눈을 맞추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런 순간을 계속 상상했어.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몰라. 자기가 내 앞에서 화장하는 모습... 사실 정말 보고 싶었거든. 어릴 때, 엄마가 화장하실 때 옆에 앉아 지켜보는 걸 좋아했어. 엄마는 화장이 아니라 하루를 준비하는 의식 같았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하루치의 기도를 화장대 앞에서 올리는 시간처럼 보였달까. 사람들이 엄마를 예쁘다고 말할 때, 내가 칭찬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어.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시간이 기다림이 아니라... 즐거움이야.”


연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급할 것 없어. 천천히 해. 사람들이 자기와 다니는 나를 부러워하게, 예쁘게"


빛톨도 거울 너머로 연우를 바라보다,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엔 말이야...” 빛톨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화장을 시작할 때면, 전 남편은 이미 차에서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었어. 클락션을 울리면서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고. 그래서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화장을 했던 기억이 없어.”


그리고는 거울 속에서 연우와 눈을 마주치며 덧붙였다.

"그런데 자긴 좀... 많이 다르네.”


빛톨의 미소는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처음 열리는 순간처럼 조심스러웠지만, 그 틈 사이로 연우에 대한 신뢰감이 흘러나왔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한 시간이 넘는 그녀의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려준 적은 없었다. 조급함 없는 시선과 보채지 않는 말투, 그리고 끝까지 기다리며 사랑스럽게 자신을 바라봐 주는 연우의 눈빛이 빛톨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연우의 기다림에는 소음이 없었다. 그의 침묵 안에는 그녀를 향한 신뢰와 존중이 있었다.


빛톨은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누구의 시선 안에서도 불안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연우의 이 다정함이 그녀를 조금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것을.




숙소에서 나와 몇 걸음만 옮기면 닿을 수 있는 작은 스타벅스 매장. 투명한 통유리 너머로 강남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마치 영화 속의 장면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잔잔한 대화 소리와 고소한 커피 향이 흐르는 그곳은, 다른 곳의 대형 매장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아늑하고 여유로운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연우와 빛톨은 라떼 두 잔과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빛톨이 먼저 자리로 가라는 듯 살짝 연우를 밀었고, 연우는 햇살이 가장 부드럽게 내려앉은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창밖 풍경이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자리였다. 커피 향, 따뜻한 햇살, 그리고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브런치의 설렘이 조화롭게 자리 위를 감쌌다.


연우는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며 빛톨을 기다리다가 문득 그녀가 보이지 않아 픽업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빛톨은 아직 그곳에 서 있었다. 연우가 편히 자리에서 쉬도록, 주문한 음료와 케이크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얼마 뒤, 양손 가득 라떼와 케이크를 든 빛톨이 웃으며 걸어왔다.


연우는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여겨질 그 사소한 배려를, 연우는 너무도 선명하게 알아차렸다. 멀리서 빛톨은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그 작은 몸짓 속에 담긴 마음을 연우가 모를 리 없었다. 자신에게 살며시 커피와 냅킨을 건네주는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이 아침의 햇살보다 더 따뜻하게 연우의 마음을 채웠다.


자리에 앉아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주는 빛톨이 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리가 너무 좋아. 햇살도, 자기 눈빛도. 치즈케이크보다 더 달달해”


부드러운 라떼 한 모금, 입안에서 살살 녹는 치즈케이크의 감미로움.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욱 달콤한 건 빛톨이 건네는 한마디의 말이었다. 그 작은 말 한마디에 연우는 아침의 평온함과 함께 알 수 없는 설렘을 느끼며 빛톨을 바라봤다. 창가를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마치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사진 속의 장면처럼 사랑스러웠다.


연우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빛톨이 연우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것은 사진을 찍히기 위한 포즈가 아니라, 자신이 연우의 시선 안에 온전히 담기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지금, 사진이 아닌 연우의 마음에 담기고 있었다.


그 순간, 창밖의 벚꽃 잎들이 가벼운 바람을 따라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위해 준비된 장면처럼.


서로의 시선 안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함께’라는 이름의 하루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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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에세이,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7.1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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