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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해 Sep 04. 2022

어느 뇌졸중 환자의 활기찬 하루

2020년 3월 22일 일요일 화창한 날씨


느지막하게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샤워를 하였다.

한창 바쁜 추가경정예산 시즌이었지만 모처럼 맞는 휴일이라 여유를 부리며 샤워를 하던 중이었다.

샤워기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 손이 닿지를 않았다. 순간 몸이 흔들흔들하더니 욕실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의식은 있는데 왜 갑자기 힘이 쭉 빠지면서 고꾸라진 건지 이유를 모른  일어서려고 몸에 힘을 주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왼손을 겨우 들어 오른쪽 팔을 건드려보았다.

나무토막 같다.

오른쪽 다리를 슬쩍 또 건드려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순식간에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다.




일단 마음을 편히 가지고 그대로 조금 누워있었다.

일 이분이 지났을까...

다시 왼손을 들어 오른쪽 팔을 만져보았다.

어렴풋 느낌이 있다.

오른쪽 다리를 만져보았다.

느낌이 돌아왔다.


잠시 더 누워있다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보았다. 서서히 몸이 움직이며 욕실 바닥에 앉은 후 천천히 일어섰다. 몸이 시계추처럼 흔들흔들거렸다. 샤워기의 물을 잠그고 욕실을 나가 젖은 몸을 대강 닦고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이 들었다.


몇 시간 후 친구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입이 어눌하였다. 카톡으로 지금 상황을 얘기했고 얼마 되지 않아 친구가 왔다. 오른쪽 얼굴이 부은 것 같다고 말해 주어 거울을 보니 부어있었다. 넘어질 때 오른쪽 얼굴을 욕실 바닥에 그대로 부딪힌 게 생각이 났다. 넘어짐의 무게를 오른쪽 얼굴이 받아 내었다.


그렇게 2020년 3월 22일 일요일 화창한 날은 지나갔다.




다음 날 출근을 하였는데 흔한 계산을 못할 정도로 머리가 멍했다. 머리에 못 하나가 박혀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갑갑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옆자리 동료에게 말한 후 계산을 부탁했다. 동료가 오른쪽 얼굴이 부어있고 부은 부분이 좀 노랗다고 말했다. 멍이 들었다.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고 결국 가까운 병원을 가 MRI를 찍었는데 의사가 급히 나를 불렀다.

촬영 부분을 보여주는 데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뇌 사진 중간중간에 하얀 것들이 보였다.

의사는 뇌졸중으로 의심이 된다며 바로 대학병원으로 가라고했고 직접 대학병원과 연결을 해주었다.

환자가 많아 다음 날로 예약을 한 후 병원을 나오는데 눈물이 흘렀다.




다음 날 병가를 내고 대학병원 신경과를 갔다. 어제 병원에서 받아온 뇌 사진과 의사 소견서를 본 교수는 언제 어떻게 이벤트가 발생하였는지 아주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화를 내었다. 이벤트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응급실로 왔어야지 왜 이제야 병원을 왔냐고 화를 내었다.

처음 보는 대학병원 교수가 나에게 화를 낸다.

기분이 묘하였다.

잠시 후 교수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고 당시 혼자여서 더 위험하였으며 정말 운이 좋아, 아마도 이 병을 가지기에는 젊은 나이여서 일 이분 안에 다시 몸이 돌아온 것 같다고 설명해주면서 뇌졸중 정확히 뇌경색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뇌 사진을 보면 며칠 전 일어난 이벤트 외에 그동안 살면서 여러 번 이런 이벤트가 있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찰나의 순간이어서 크게 못 느꼈을 거라고, 하지만 뇌 사진에는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고 사진에서 보이는 하얀 부분은 뇌가 죽은 것이라는 설명도 해주었다.

꽤나 많은 부분에 하얀 점이 있었고 며칠 전 이벤트 자리라는 곳은 꽤나 크게 하얗게 변해있었다.

뇌의 부분들이 저마다 기능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죽어버린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의 기능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질문에 교수는 다른 뇌의 부분들이 그 기능을 대신하여 일을 한다라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내 뇌는 품앗이를 하고 있었다.

미련한 주인 때문에 뇌가 품앗이를 하며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은 일대로 생활은 생활대로 계산은 계산대로 잘하고 살고 있었다. 남들보다 적은 양의 살아있는 뇌를 가지고서 말이다. 순간 나 엄청 똑똑한 사람이었나...라고 잠시 생각했다.


검사 일정을 잡기 위해 교수 방을 나왔는데 그제야 병원 복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환자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아... 너무 일찍 이 병을 얻었다. 너무 빨리 병이 들었다. 신기한 듯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환자 가족인가 했는데 당신들과 같은 환자여서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다음 눈빛은 연민이었다.




태어나서 가장 많은 검사를 하였다.

한 번은 몸 안에 조형제를 넣어 피의 흐름을 보는 그런 검사였는데 주사 바늘이 메밀면 같았다.

그 굵은 주사 바늘이 팔에 꽂히는데 꽂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굵었고 굵기만큼 고통도 심하였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심장 주위에 기계를 달고 일상생활을 하였다. 뭔가를 기록하는 장치라고 설명해주었는데 그 당시의 내 머리는 계속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상태여서 무어라 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냥 묵묵히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검사를 했다.


그다음에는 순환기내과로 보내어졌다.

거기에서는 내시경 할 때 넣는 호수를 생짜로 목 지기에 집어넣고 숨을 들이쉬라면 들이쉬고 멈추라면 멈추고 내쉬라면 내쉬기를 반복하던 검사를 하였다.

구역질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나 같은 환자는 처음 본다며 때아닌 칭찬을 하였다.

사실 구역질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죽어라 참았다. 대신 눈물이 찔끔 났다.


나에게 일어난 이 일들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병명은 이미 진단 내려졌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해결책이 생겼다.

'난원공 개존증'

태어나서 처음 듣는 단어였는데 지금도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심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 그 구멍으로 피가 한 방울이라도 잘못 들어가면 그 피가 혈관을 타고 올라가 뇌혈관을 막으면 이러한 이벤트가 발생한다는 순환기내과 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방법은 심장수술이었는데 이 또한 정확한 원인이라 볼 수는 없어 수술을 하면 위험률은 낮아지겠지만 앞으로 이러한 이벤트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하더라도 수술은 꼭 필요하다가 아니라

이러하니 환자가 수술을 할지 말지 결정을 하라고 말해주며 나를 다시 신경과로 보냈다.

신경과 교수에게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수술을 하든 안 하든 재발의 위험성이 여전히 남아있으니 위험을 안고 살아가겠다고 결정을 하였다.




검사도 계속 진행하고 또 쉬어야 한다며 한두 달 정도 요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힌 진단서를 받았고 그렇게 45일간 병가를 내었다.

휴식이 너무나 간절했고 스트레스는 하루치를 초과해버리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며 그 많은 양의 업무와 야근을 깡으로 버티는 날들이 끝을 모르고 내달리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갑자기 얻어낸 45일간의 시간으로 어리둥절하였지만.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몸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일단 운전을 할 수가 없었고 혹시나 운전하는 동안 다시 이벤트가 발생할까 봐 겁이 나서 할 수가 없었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6킬로미터 이상 걷던 체력은 단 5분을 걷기도 힘이 들었다. 일단 몇 분을 걸으면 몸이 흔들렸고 땅이 푹하고 꺼지는 것만 같은 증상이 계속되어 병원을 갈 때는 항상 친구에게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 또 한 번 이벤트가 발생하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그 느낌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단어가 없다. 한 번 겪어 본 느낌이라 그 비슷한 기분만 들어도 이제는 귀신같이 느낄 수가 있는데 아무튼 진짜 기분이 나쁜 느낌이다. 기분이 정말 뭐 같다.)

급하게 응급실을 갔다.

교수가 또 증상이 느껴지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무조건 응급실에 방문해서 교수 이름을 말하라고 일전에 알려주어 응급실에 가서 교수 이름을 말하고 바로 교수를 만났다.

교수는 그 자리에서 오더를 내렸는데 순식간에 간호사 네 명이 내 팔과 다리에 하나씩 붙었다.

그리고 갖가지 호수를 연결하기 위해 바늘을 양쪽 팔과 다리에 찔러댔다.

동시에 찔러대니 어디가 아픈지 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몸은 혈관이 잘 안 보인다.

간호사들이 고전을 하였고 결국 손등과 발등에 그리고 무릎 뒤쪽에 찔러댔다.

그 과정에 피가 쏟아져 응급실 바닥이 피로 물들었고 주위에 있던 환자들은 놀라서 쳐다보았고 친구는 화를 내었으며 간호사는 묵묵히 피를 닦아내었다.

그 후 나는 휠체어에 앉혀진 채 빠른 속도로 검사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다른 환자들을 제치고 1번으로 검사들을 순식간에 마쳤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거의 탈진하였고 한참 뒤에나 다행히 입원실이 아닌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체력이 약해져서 자주 잠을 잤고 자고 일어나서 편의점이라도 갈라치면 몸이 흔들흔들거렸고 땅이 내려앉는 것만 같은 느낌을 계속 받았다.

걷고 싶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걷고 집에 돌아올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고 발바닥에 불이 날 것 같은 기분이 그리웠다.

그렇게 나는 무기력해져 갔고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유튜브를 이리저리 돌리며 보고 있었는데 아크릴화를 그리는 영상이 눈에 띄었다.

학창 시절에도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흔한 미술학원을 다닌 적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캔버스에 파도가 치는 바다를 그려나가는 데 마술 같았다.

또 다른 영상을 찾아보았다. 아주 멋진 벚꽃나무를 흐드러지게 그려나가는 데 또 마술 같았다. 그렇게 며칠을 더 아크릴화 영상에 빠져있다가 인터넷으로 미술용품들을 주문했다. 학교 다닐 적에도 과제가 아닌 이상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리고 싶어졌다.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물감이 떨어지고 캔버스가 떨어지면 또 주문하기를 여러 번 하다가 이번에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영상을 보고 다시 깊게 빠져들었다.

아이패드를 급하게 주문을 하였고 그렇게 나의 그림 그리기는 뇌졸중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조금 쉬고 싶으면 책을 읽었다. 언젠가 나도 책을 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는데 시간이 주어지니 쓰기 전 읽기 시작했다. 철학을 좋아한다. 철학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읽어나갔다.

그래도 역시 가장 좋은 건 '어린 왕자'와 '데미안'이다. 어린 왕자와 데미안은 철학 속의 철학 같은 책이다.

그 후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글이라고는 학창 시절에 문예반과 방송반을 하면서 써본 게 다였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고 결국 써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어이없게도 처음으로 쓴 게 소설이었다. 자주 상상을 하는 데 그 상상들을 소설로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도 없는 무모함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미친 듯이 그리고 정말 재미나게 써 내려갔다. 적어도 나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도 한 편 썼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닥치는 대로 썼다.


그렇게 쓴 소설은 내 브런치 작품 속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는데... 부끄럽다.

소설을 '펑'할까도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소설을 읽어주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좋아요'를 눌러주신 작가님들을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된다라는 생각에 지금도 그대로 두고는 있는데.

소설에 '좋아요'가 눌리는 날이면 깜짝 놀라 혼자 얼굴을 붉히고 있고 그다음 편이 연속으로 '좋아요'가 눌려지면  '그만 그만 제발 그만이요... 부끄럽단 말이에요 ㅠㅠ 정녕 계속 읽으시겠다면 제발 유치하다고만 말하지 말아 주세요, 하실 거면 그냥 속으로만 해주시고 더 좋은 건 다음 편으로 넘어가지는 말아주세요.'라고 조용히 기도를 한다.




지금도 뇌졸중 약을 먹고 있으며 앞으로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은 계속 먹어야 하고 석 달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 가서 교수님을 만나고 상담을 받고 새로운 약을 받아야 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오래 걷기는 할 수가 없는 상태이고 최근에 가장 먼 거리로 걸었던 기록은 3킬로미터였다. 그것도 아주 느린 속도여서 걷다보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앞질러 간다. 할아버지도 나를 앞질러 간다.


최근에 교수를 만나 상담한 내용은 심리적인 부분이었는데 다리 위를 건너거나 아주 큰 횡당보도를 건너려고 하면 몸이 흔들거리고 땅이 푹 꺼져 다시 쓰러질 것만 같다고 얘기를 하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였다. 이벤트 당시 집이었지만 혼자였고 누구의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 당시 몸이 스스로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끔찍할 정도의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리 위나 큰 횡단보도 같이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그때의 기억이 오버랩이 되어서 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권해주셨는데 조금 더 스스로 이겨보겠다고 하고 정신과는 차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였다.


그날의 기억으로 지금도 욕실에 들어갈 때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당시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나에게 친구는 좋게 독립적이라 하였고 나쁘게 독한 년이라고 하였다. 일이 일어난 후 6개월이 지나서야 가족들에게 그간의 일을 전하였다.

나때문에 걱정하고 슬퍼지는 게 싫다. 설령 가족이라하더라도 나때문에 슬픈 게 싫다.

그냥 나 혼자 슬프면 된다.




행복은 불행과 같이 오지만

불행도 행복과 함께 온다.

한 세트이고 동전의 양면과 같고 밝음과 어둠, 추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아프락삭스다.


나의 불행은 45일이라는 시간을 선사해 주었고 그 45일이라는 시간은 다시 글과 그림이라는 선물로 바뀌었다. 몇 달 후 승진을 하면 지금 있는 기관을 나가 조금은 편한 곳으로 옮길 계획이고(안 보내주면 인사계를 찾아가 드러누울 생각이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 새로운 소설을 구상 중이며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화실도 다닐 계획이고 조향 학원도 다닐 생각이다.


이벤트가 일어난 후 내 뇌의 일정 부분은 죽어버렸지만 남아있는 나의 예쁜 뇌는 이벤트 전에 없었던 글과 그림까지 머릿속에 넣어 더 열심히 힘차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 기관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감나무가 빨갛게 익으면 동네 주민들이 감을 따간다.

두 개를 남겨놓고 감을 따간다.

매년 딱 두 개를 남기더라.

까치밥이다.

며칠 내내 까치가 보이고 어느 순간 감 두 개도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깊은 겨울이 찾아와 어느덧 한 해가 지나간다.


이 곳에 다니면서 내가 본 가장 예쁜 모습이다.

이 모습이 나는 그렇게 예쁘더라.


올해도 그러하기를 기대하며

매일 출근길에 감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기도를 한다.

'감나무야 감나무야 빨리 빨갛게 익어라.

나 살아서 나가게...'



어느 뇌졸중 환자의 활기찬 하루였습니다.


감나무야 감나무야 빨리 익어라

글. 그림 by 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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