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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지
스물세 살 즈음부터 다양한 옷을 시도했다. 왕복 여섯 시간 통학을 했던 터라 살이 쑥쑥 빠져서 사이즈 걱정이 없었다. 머리 스타일도 참 자주 바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머리는 빨간 단발에 한 파마머리이다. 나라는 사람을 참 열심히 알아가던 시기에 한 머리였다. 본가가 있는 아파트 단지 후문 쪽에 지금은 없어진 미용실이 있었다. 나와 엄마는 그곳의 단골 손님이었다. 가까워서 다녔던 터라 간판 이름도 몰랐다. 미용실에 가면 '뿌리부터 중간롤로 말아주세요.'라고 말했고, 원장님은 뚝딱뚝딱 머리를 만들어주셨다.
검은 끼가 많이 도는 파란색, 갈색, 탈색까지 머리를 좀처럼 가만두지 못하고 여러 색으로 물들이며 못 살게 굴었다. 바리깡으로 밀 정도로 짧게 자르기도 하고 허리까지 기르기도 했다. 자기만의 색과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어설프게 흉내를 냈던 것 같다.
옷차림에 제약을 받은 건 초등 논술학원 강사로 일할 때뿐이었다. 대학 도서관에서 프리랜서로 일할 땐 어떤 스타일이든 원하는 옷을 입고, 머리를 지지고 볶아도 괜찮았다. 애초에 나를 담당하는 직원은 본사에 있었다. 같은 사무실 팀장님이나 다른 직원들도 개의치 않으셨다. 오히려 알록달록한 모습을 좋아하셨다.
강사로 일하는 동안 옷차림 지적을 은근하게 받았다. 그때 나는 가슴까지 오는 생머리였는데, 머리스타일도 어른스럽기를 바라는 분위기였다. 좋아하는 보라색 골덴 바지를 입고 갔더니 ‘소연 선생님은 골덴이 안 어울린다’라고 했다. 그 말을 믿었다. 그땐 안 어울리는 옷은 입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어리숙하지 않은데 어리숙한 척을 하면서 착실하게 조언과 충고를 수용했다. 슬랙스에 셔츠, 무난한 원피스로 점차 스타일이 변했다. 200만 원 대 월급으로 옷을 자주 살 수 없으니 일할 때도 입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옷을 샀다. 어느 날은 친구가 말했다. “너 진짜 학원 강사 같다.” 그 말이 그렇게 싫었다.
학원을 관두고 나오면서 지금 사는 동네에 있는 미용실을 예약했다. 허리까지 기른 머리를 잔뜩 볶아달라고 했다. 자주 하던 머리인데 오랜만에 고불고불한 머리가 어색했다. 봄이 오면서 앨비스 프래슬리가 그려진 프린트 티셔츠, 초록색 캡모자도 생겼다. 당연히 골덴바지도 다시 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나시 원피스, 크롭 니트, 찢어진 청바지까지 학원 출근을 생각하면 못 샀을 옷이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옷장 정리를 했다. 그때마다 버릴 옷이 생겼고, 미련 없이 헌 옷 수거함에 버렸다. 한쪽 벽에 세워진 행거에 새 옷을 들였다. 내일은 초록색 모자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외출할 계획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장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