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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May 23. 2024

이번 역은 기역입니다.



8.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우리는 가끔 영화를 본다. 주말 밤마다 보는 시사 프로그램의 주제가 끌리지 않거나 같이 볼만한 유튜브 영상이 똑 떨어질 때가 있다. 혼자였다면 유튜브를 보고 또 보았겠지만, 그는 그런 순간이 오면 휴대폰 노트 앱에 적어둔 영화 목록을 슬쩍 내밀었다. 나는 그중 그나마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골랐다. 


  그는 오래전부터 영화 얘기를 나누면 <8월의 크리스마스>와 <식스센스>를 말했다. 정말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유명한 영화였지만, 왠지 그냥 보고 싶지 않았다. 원래 부추기면 더 하기 싫은 법이었다. 그는 이런 나의 마음가짐을 심보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보게 된 날, 막판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영화 추천에 자신감을 붙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가 추천한 영화는 대체로 재미있긴 했다. 


  예외가 없으면 스릴러나 오컬트 장르를 주로 보았다. 내가 로맨스나 가족물, SF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 에스터부터 조던 필, 나이트 샤말란의 필모그래피를 함께 훑었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를 지나 지난봄엔 장재현 감독의 영화들을 보았다.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악 소리를 지르는 나 때문에 덩달아 놀라는 그를 보고 웃다 보면 어느새 손바닥에 땀이 찼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그는 붕 뜬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영화 목록을 보여주었다. 영화 보기 싫다고 중얼거리며 목록을 쭉 보는데 눈에 걸리는 제목이 있었다. 바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였다. 이동진 평론가가 별점 5점을 준 영화, 아는 지인이 일 년 가까이 프로필 배경화면으로 해놓은 영화, 정신없는 포스터가 무엇도 예측할 수 없어 보지 않았던 영화였다. 어차피 봐야 한다면 이걸 보겠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펑펑 울었다. 그는 왜 우냐고 물었다. 나는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삶에 기대가 없어 거대 베이글 속으로 소멸되려는 조부이자 조이에게서 지난날의 나를 보았다. 모든 필연적 사건으로 이어지고, 처음 사는 삶조차 예상 가능하다는 허무함이 너무 익숙했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처럼 말하는 '다음 생엔 돌로 태어나자'는 마음이 드러난 장면도 그랬다. 


  에블린은 어땠더라. 조이와 같은 돌덩이가 되었을 때 조이를 따라 기꺼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세상을 대할 때 필요한 올바르고 솔직한 방식처럼 보였다. '혼란스러울수록 친절해지자, 모두 내가 너무 착하다고 말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서 살아남았으며 나 역시 투사이다'라고 말하는 웨이먼드의 대사도 머릿속에 남았다. 실없이 잘 웃어서 쉽게 보이는 내가 자주 미웠다. 잘 웃는 건 딱 이십 대까지만 장점이 되었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아무 데서나 웃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내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는데, 웨이먼드의 대사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위로해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엄마와의 점심 약속이 있다. 마침 오늘이 그날이었다. 엄마는 유방암 완치 소식과 함께 폐 전이가 의심된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딱 십 년만이다. 스물셋의 나는 엄마의 유방암 소식을 들었고, 서른셋의 나는 엄마의 폐 전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 집처럼 익숙했던 혜화동 병원이 생각났다. 검사는 올해 11월 겨울이었고, 엄마는 지난번처럼 같이 가달라고 했다. 말년에 내가 태워주는 비행기 탄다더니, 잘 살아있어야 말이지. 괜히 엄마의 사주 이야기를 꺼내며 농담을 하자, 엄마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결과를 기다려야 할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참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냥 평소처럼 내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밖에 없었다.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고, 어떤 힘을 써도 바꿀 없는 것이 있으니까. 지금처럼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거대 베이글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베이글이 더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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