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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링엄마 Apr 30. 2024

끈 나시가 무언의 웅변을 한다

건조기, 이 유능한 녀석 같으니라고

 너무나도 유능한 문명의 이기인 건조기는 때때로 시간을 거스른다. 축축한 빨랫감 무더기 속에서 미처 솎아지지 못한 나의 얇은 흰색 끈 나시 한 장은 뜨끈한 건조기 안에서 내가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겨우 입을 수 있을 만큼 회춘해 버리고 말았다. 앙증맞은 모양새가 다리 한 짝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한 끈 나시를 양손으로 잡아들고 눈높이까지 올려 보니 딱 너의 것이다 싶다.      


  나는 홀린 듯 너에게 다가갔다. 너를 안아 들고, 너에게는 살짝 길 것이 분명한 나시의 어깨끈을 엑스 자로 한 번 교차시켜 입혔다. 끈 나시는 그야말로 너의 것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심지어는 어깨끈을 교차한 덕에 앞뒤로 홀(hole)이 생겼는데, 그 홀은 마치 블랙홀처럼 어서 손을 짚어넣으라며 무언의 웅변을 하는 듯했다. 가족들의 손은 속절없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금지된 것이 내뿜는 터부의 마력처럼 나는 내 손이 끈 나시를 은밀히 비집고 들어가 너의 털을 쓰다듬을 수 있음에 전율했다. 이토록 끈 나시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니.      


 건조기는 정말로 문명의 이기 중의 이기라 할 만하다.          


우주적으로 치명적인 끈 나시 푸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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