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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몸과 대화하는 시간

by 서가앤필

<비폭력대화>. 이 책에서마저 운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할지 몰랐다. 당연한 책에서 당연한 이야기가 나오면 놀랍지 않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외의 문장을 발견할 때면 꼭 표시를 해 두게 된다.


비폭력대화에 나온 몸 이야기다.


'몸의 반응을 인식하는 것은 자기 인식의 첫걸음이다.'



인생은 혼자구나라고 깊게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잊히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는 그 순간... 최근 몇 년 동안 거의 입 밖으로 내놓지 않는 과거의 한 장면이다. 내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날 이후 몸에 대한 내 생각이 완전히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10년 전쯤 일이다. 24주 유산을 하고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정된 사산이었다. 13주부터 미리 진단을 받은 상태라 출산 아닌 유산까지는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몸의 반응 하나가 있었다. 가슴에서 젖이 나왔다. 유산이든 사산이든 출산이라고 인지한 몸은 젖을 생산해 냈다.


출산휴가를 내고 휴직했지만 출산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복직 신청을 해야 했다. 한쪽 손으론 핸드폰을 들고 직장에 복직 상담을 하고 반대편 손은 흘러내리는 젖을 막아야 했다.


양배추 크림을 바르면 젖이 빨리 마른다길래 부랴부랴 주문했다. 양배추 크림이라는 게 세상에 있는지 처음 알았다. 크림이 도착하기 전까지 냉장고에 있는 생양배추를 가슴 위에 올렸다. 오목하니 뭔가 브래지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슬프고 안타깝기보다는 그러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안을 찾고 해결책을 스스로에게 제시하는 내가 싫었다.


인간은 어쩌면 한낯 생물학적 몸뚱아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내가 한낯 몸뚱아리에 불과하다면 몸을 다시금 바라봐야 할 일이었다.


여태껏 정신과 이성의 다음 정도로만 생각했지 나를 이루는 메인일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확 뒤집는 게 맞겠구나 싶었다. 몸이 먼저였다.


몸의 반응을 인식한 나의 첫 경험은 나를 인식한 첫 경험이었다.


나는 이제 정신과 대화하는 게 아니라 몸과 대화하기로 했다. 운동은 온전히 내 몸과 대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관련책 - 비폭력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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