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그리기 숙제
1.
근육 그리기 숙제
근력 운동을 시작하고 6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트레이너가 숙제라며 근육을 그려오라고 했다. PT수업 중에 동작 시범을 보이며 근육 이름 몇 가지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내용 중 절반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다. 시범을 보여주면 따라 하면 되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근육을 말하며 설명할 때는 느낌상으로만 알아듣고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 후에 하는 운동이라 근육 이름이 궁금하면서도 막상 정확한 위치나 이름을 찾아볼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찾아봐야지 하면서 시간만 가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구나 싶었다. 첫 번째 숙제는 다리 뒤쪽 근육을 그려보라는 거였다.
그래도 6개월 근력 운동을 한 짬밥이 있어서 햄스트링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리 근육을 그려가며 알게 된 사실. 햄스트링은 1개 근육 이름이 아니었다. 반건양근, 반막양근, 대퇴이두근이라는 근육 3개를 묶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림을 그려가며 근육을 알아가다 보니 그동안 해 오던 근력 운동이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무언가 기존 운동과 다른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았다. 왠지 점점 더 빠져들 것만 같았다.
2.
몸도 공부가 필요하다
PT 수업은 트레이너가 시범을 보여주면서 동작을 설명해 주고 거기에 따른 이론도 중간중간 설명해 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오늘 할 동작은 덤벨 오버헤드 트라이셉스 익스텐션입니다. 삼두근을 위한 운동입니다. 이 동작의 주동근은 삼두근이고 협응근은 이두근입니다. 앉아서 하지 않고 서서할 예정이기 때문에 복근에도 힘을 잘 주어야 합니다."
지금이야 이 말을 다 알아듣지만 처음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시범 동작을 보여주면 눈으로 보고 따라 하기에도 벅찼다. 그 당시 못 알아들었던 단어들을 나열해 보면 이렇다.
- 덤벨 오버헤드 트라이셉스 익스텐션
- 삼두근
- 주동근
- 협응근
- 이두근
- 복근
아이쿠야, 총 나열해 보니 6개나 된다. 거의 못 알아듣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말인데 여전히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많다는 사실을 헬스를 시작하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건 뭐 우리나라 말인지 영어인지도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지금에서야 다 알아듣는 6개 단어의 뜻풀이를 하면 이렇다. 덤벨 오버헤드 트라이셉스 익스텐션은 동작의 이름이다. 동작의 이름에도 순서가 있는데 우선 덤벨은 기구다. 덤벨로 하느냐 바벨로 하느냐에 따라 가장 먼저 기구 이름이 붙는다. 두 번째 나오는 단어인 오버헤드는 단어 뜻 그대로 머리 위로 올린다는 의미다. 첫 번째에 기구 이름이 나왔다면 두 번째는 동작이 나온다. 여기까지만 보면 덤벨을 머리 위로 올린다는 의미다.
자 이제 세 번째. 세 번째는 트라이셉스는 삼두근을 영어로 한 것이다. 삼두근이 어디인지도 몰랐으니 트라이셉스라는 단어를 몰랐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익스텐션(Extension)은 펴다는 의미다. 접은 다음 펴다. 이렇게 동작 1개의 이름에도 4가지의 해석이 필요하니 동작 이름 1개 익숙해지는데도 나름의 연구가 필요했다.
운동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이런 이름쯤이야 익숙해서 입에서 막 나오겠지만 근력 운동을 제대로 처음 배워보는 나에겐 동작 이름 1개 입에 붙이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다음 나오는 삼두근은 팔 뒤쪽 근육을 말하고 이두근은 팔 앞쪽 근육 이름이다. 복근은 알다시피 배에 있는 근육이다.
여기서 주동근, 협력근의 의미도 모르고 넘어갈 수 없다. 주동근은 글자 그대로 어떤 동작에 주가 되는 근육이다. 예를 들어 트라이셉스 익스텐션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동근은 삼두근이다. 동작 이름 속에서 제가 주동근이에요 하고 말해주고 있다. 협응근은 협조해서 도와주는 보조근육이다. 협응근을 협력근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또 1가지. 주동근, 협응근 외에 길항근이 있는데 길항이란 반대라는 뜻이다. 당기는 근육과는 반대로 미는 근육이 길항근이다.
동작 이름을 분해하고 근육 이름을 알아가다 보니 그동안 내가 몸에 대해서 너무나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게 미안했다. 몸의 주인은 원래 나였는데 그동안 남처럼 대했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제부터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느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이 가기 시작했다.
3.
몸공부하기 좋은 책 추천
근육과 뼈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니 트레이너가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었다. 자신이 쉽고 재미있게 보았던 책이라며 <석가의 해부학 노트>라고 했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를 책으로 찾아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바로 주문을 했다. 수험생 때나 보던 수험서만큼 두꺼웠지만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고 재밌었다. 해부학 노트라는 책을 쓴 사람이 그림을 전공한 작가라니 꽤나 흥미로웠다. 내용은 만화로 되어 있어서 짬짬이 보기에도 좋았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책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 석정현 작가는 그림을 공부하는 이들이 좀 더 전문적인 인체 표현 전문가로서의 소양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 시간이 흘러 이렇게 해부학을 궁금해하는 회원에게 트레이너가 추천하는 책이 되고 있다는 걸 석정현 작가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3억 대 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해 자수성가한, 평균 60조 사원을 거느린 '몸'이라는 초 거대기업의 CEO와 다르지 않습니다. 최고 경영자가 자신의 기업에 대한 외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그 기업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이전에, 그 기업이 과연 스스로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몸에 대해 아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의 시작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은 사람을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희망과 깨달음을 안겨줄 의무를 지닌 예술가들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죠. "
- <석가의 해부학> 서문 중에서 -
4.
숙제를 숙제로 보지 않기
요즘도 가끔 트레이너와 4년 전 근육 그리기 숙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 이후로도 근육 그림을 통해 위치와 이름을 외워보는 근육 그림 숙제를 종종 다른 회원에게도 시도하지만 그 당시의 나만큼 충실하게 해 오는 회원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당시 나에게 근육 그리기는 숙제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숙제를 내주는 사람은 숙제의 의미로 내줬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숙제로 안 받으면 그만이다. 나에겐 즐거움이었다. 마침 근육 이름도 궁금해서 공부해보고 싶었던 찰나에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각각의 색연필로 색을 달리해 근육결대로 색칠해 가는 작업은 어릴 적 꿈이 화가였다는 생각도 다시 떠오르게 했다.
요즘도 생소한 근육 이름을 접할 때면 4년 전 근육 그리기 숙제를 했던 때가 생각난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근육 지식이 쌓인 회원이 되었다는 생각에 트레이너가 근육 숙제를 내주지는 않지만 가끔 스스로 근육 그림을 그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은 골반 근육을 풀었으니 고관절 부위 근육들을 그려볼까 하면서 말이다.
* 관련책 - <석가의 해부학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