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최고의 선생님
몬태나 보즈만으로 이사를 온 지 6개월 정도가 지나니 어느덧 나도 이 마을에서 꽤 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즈만은 몬태나의 도시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도시, 미국 내의 많은 소도시 중에서도 인기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모임에 가면 이사를 온 지 6개월도 안 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반년 살았다고 하면 그것보다 더 짧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보즈만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대학의 이름은 몬태나주립대학교. 보즈만에서 산 지 6개월쯤 지났을 무렵 이 대학교의 교수님으로 새로 오신 분을 만났다.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오셨고 오랜 기간 미국에서 공부하신 후 교수님이 되셨다. 한국사람들이 적은 곳이다 보니 누가 새로 오면 금방 소식이 전해졌고 또 만남의 장의 주선되곤 했다. 새로 오신 교수님은 알고 보니 우리와 같은 지역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 대신 써니 언니로 부르게 되었다.
언니와 안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내게 연락을 해 오셨다. 점심에 가끔 대학 캠퍼스에 있는 푸드 트럭에서 도시락을 사 먹곤 하는데 거기에서 만난 요리사가 한국요리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셨다. 그 요리사는 보즈만의 요리학원에서 일을 하는 분이었고 각국의 요리를 선보이는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언니께서는 한국에서 선생님이었으니 요리도 한번 가르쳐 보면 어떻겠냐며 관심 있으면 요리사님에게 꼭 연락을 해 보라고 하셨다.
적어 주신 이메일로 연락을 드려보니 바로 만나자고 하셨다. 그다음 날 캠퍼스 커피숍에서 만남을 가졌다. 요리사님께서는 요리학원에서 일을 하며 대학 캠퍼스 푸드 트럭도 운영을 한다고 하셨다. 요리학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소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세계 각국의 요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많은 세계 요리를 진행했지만 한국요리는 그동안 해 본 적이 없었다며 가능하다면 내게 꼭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나는 요리에 관심이 많으니 재능기부라면 언제든지 좋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요리학원 원장님과 상의를 해 보고 다시 연락을 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연락을 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한국요리 쿠킹 클래스 날짜를 정하고 싶다며 내게 어떤 요리가 좋겠냐고 하셨다. 모든 것은 내가 정할 수 있다며 요리는 2가지 정도 할 수 있고, 어떤 재료라도 사 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내용을 듣고 보니 요리만 해서 주는 것이 아닌 요리를 하면서 과정을 보여주고 손님들은 앉아서 의사소통만 함께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쿠킹쇼가 끝나면 다 같이 시식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제과 제빵을 시작으로 각종 음식 만들기에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을 때여서 요리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영어로 모든 과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한 후 써니 언니에게 조언을 구했다. 언니께서는 영어 너무 잘해도 이상(?)할 거라며 부담 없이 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실수해도 영어 못해도 부담이 없을 거 같았다. 경험 삼아 재미 삼아 도전해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무슨 요리를 선보일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몬태나 요리학원에서의 첫 한국요리 수업. 일단 대표성이 있으면서 맛도 있는 요리를 고르고 싶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인 2시간 안에 재료 설명부터 10인분 이상의 요리 완성까지 모두 할 수 있어야 했다. 호불호가 적으면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요리인 불고기와 잡채를 하기로 최종 결정을 했다. 고기도 먹고 면도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쿠킹 클래스에서 맛있는 요리를 선보이고 시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나는 시작 전 한국에 대한 간단한 안내와 인기 있는 한국음식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요리를 하기보다는 요리 과정을 프레젠테이션으로 먼저 안내해 준 뒤 진행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학원 원장님에게 이메일로 이러한 내용을 문의드리니 여태껏 쿠킹클래스에서 그런 순서를 가져 본 적은 없었지만 한국요리는 처음이고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라며 모니터와 컴퓨터 연결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의 걱정은 시작되었다. 경험 삼아 재미 삼아 해 보자며 쉽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앞으로 3주 후에 있을 요리 수업에 대한 부담이 갑자기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놈의 영어 때문이다. 일단 아직 시간이 있으니 여기저기 쿠킹 프로그램을 많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평소 요리를 하기 위해 찾아볼 땐 요약된 내용, 레시피만 참고를 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요리를 설명하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쿠킹 프로그램의 설명 내용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이 설명을 위해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을까?', '이렇게 설명을 하면 좋겠구나!'
남편은 옛날에 몇 번 본 적이 있다면서 망치님의 유튜브를 아냐고 했다. 나는 처음 들어 보았는데 하면서 유튜브 채널을 찾아보니 무려 구독자 수가 오백만! 쉬운 영어로도 쏙쏙 귀에 들어오는 설명, 자신감 있는 표정과 재미있는 진행으로 각종 한국요리를 소개하고 계셨다. 못한다고 할까, 일정을 좀 미룰까, 말없이 요리만 한다고 할까 등등 영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런저런 괜한 생각들을 많이 했지만 딱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문득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날짜는 금방 다가왔다. 큰 일을 기다리고 있을 때 시간은 두세배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남편과 아들도 같이 가서 참관을 하며 프레젠테이션 클릭을 도와주기로 했다. 손님들께 선물로 줄 김, 마스크 팩, 한국 라면도 2개씩 준비해서 갔다. 쿠킹 클래스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을 했다. 요리사님, 원장님 모두 내게 무엇이든지 도와줄 테니 말만 하라고 했다. 요리사님께는 불고기감으로 쓸 소고기를 미리 얇게 썰어달라 부탁을 드렸고, 원장님께는 양파, 당근, 파 등 야채 손질을 도와달라고 했다.
시작하기 10분 전쯤이 되자, 사람들이 한둘 모였고 모두 8분이 내 앞에 자리했다. 외국인은 한 명도 없고 모두 다 미국인 분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모두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지금부터 망치님으로 빙의한다! 나는 몬태나 망치다!'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왠지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며 시작을 하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설명을 하며 퀴즈를 내고 준비해 간 선물을 드리니 받는 사람들마다 땡큐! 하며 활짝 웃으셨다.
불고기 양념을 만들고 재운 후 냉장고에 넣고 잡채 만들기를 시작했다. 당면이 삶아지는 동안 채소를 볶으니 시간이 알맞았다. 잡채 볶기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요리사님께 볶아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고 재워진 불고기를 꺼내서 손질된 야채와 함께 끓이기 시작했다. 도와주시는 분이 두 분이나 계시고 모든 요리 장비와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이라 문제없이 요리가 착착 진행되었다.
먹음직스럽게 불고기와 잡채가 모두 완성이 되고, 넓은 접시에 담아서 나눠 드리니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3주 동안 준비하고 영어 연습한 시간이 보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도 맛을 보니 아주 훌륭했다. 똘똘이도 엄지 척! 집에서는 적은 양만 요리해 오다가 처음으로 10인분이라는 많은 양을 요리해서 긴장을 했는데 다행이었다. 함께 요리를 도와준 요리사님, 원장님 모두 너무 감사하다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한국에서 사십 년 동안 해 온 요리보다 몬태나에서 반년 동안 해 온 요리가 더 많았다. 사실 요리가 영어보다 더 쉬웠다. 이번 요리학원에서의 요리는 내게 많은 양의 요리를 정해진 시간에, 그것도 영어로 설명해 가면서 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다 마치고 나니 커다란 뿌듯함을 내게 선사해 주었다. 불고기와 잡채! 이제는 하나도 안 어렵게 느껴진다. 역시 경험이 최고의 선생님이다. 앞으로 망치님의 유튜브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