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is not rational. Food is culture, habit, craving and identity. -Jonathan Safran Foer-
한국에서 사는 동안 가장 즐겨먹었고 맛있게 먹었고 만만하게 생각했던 음식은 김밥이었다. 김을 좋아하기도 했고 김밥만 있으면 반찬 필요 없이 한 끼를 골고루 먹을 수 있어 간편했다. 출장이나 바쁜 일이 있을 때 김밥 집에서 김밥 한두 줄 만 사 오면 금방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고 어릴 적 소풍 때 먹었던 엄마 김밥의 추억도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한국의 마트 어딜 가도 김밥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나는 한국에서 산 사십 년 동안 김밥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00 천국, 00 나라, 김가네 00 등 김밥집이 도처에 있어서 사먹기가 참 편리했다. 사서 먹는 김밥도 아주 맛있었기에 굳이 김밥 재료를 사서 집에서 만들어 먹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김밥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만 만드는 것은 절대 간단치 않다고 생각했다.
몬태나로 이사를 와서 가장 그리운 음식은 김밥이었다. 몬태나 보즈만에는 한국 마트가 없다. 따라서 김밥용 김, 단무지, 어묵 등의 김밥 재료도 아주 귀하디 귀한 식재료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단무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몬태나에서는 너무 귀하다 보니 가끔 생각나는 재료 중 하나였다. 코스트코에서 사 온 도시락용 구운 김으로 김밥처럼 먹어보려 했지만 얇고 작은 김으로는 제대로 된 김밥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몬태나로 온 지 몇 달이 지난 후, 드디어 한국에서 보내주신 소포가 도착했다. 한국 마트가 없다는 것을 아시고는 가족들이 미역, 라면, 멸치, 김밥용 김, 카레, 짜장, 보리차 티백, 스틱형 차, 그리고 각종 한국 과자 등을 잔뜩 보내주셨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기다린 것은 김! 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드디어 처음으로 몬태나에서 김밥을 싸 보기로 했다.
# 꼬마 김밥
김밥을 처음 만들 때 도전해 본 것은 꼬마 김밥이었다. 내용물을 조금만 넣어도 되고 싸는 법도 더 간단했다. 햇살 좋은 날, 차를 타고 30분이면 갈 수 있었던 하얄라이트 저수지 근처 소풍 테이블에 처음 만든 꼬마 김밥과 라면을 가지고 자리를 잡았다. 보온병에 넣어 온 뜨거운 물은 아직도 충분히 뜨거운 상태였다. 똘똘이는 튀김 우동, 나와 남편은 진라면 매운맛. 꼬마 김밥과 신 김치, 그리고 컵라면의 조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사라와 필립네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도 꼬마 김밥을 만들어 갔다. 미국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은 경우대부분은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로 이루어졌다. 포트럭 파티란 각자 자신이 만든 음식을 가져와서 함께 나누며 즐기는 모임을 말한다. 김밥과 더불어 간장과 겨자로 만든 김밥 소스도 작은 통에 넣어서 가지고 갔다.
사라가 준비한 음식은 닭고기를 듬뿍 넣은 카레. 카레 맛도 일품이었다. 하지만 필립은 연신 김밥을 집어 먹었다. 어릴 적 일본에서 6년이나 살아서 김을 좋아할 걸로 예상은 했지만 김밥을 이렇게 잘 먹을 줄은 몰랐다. 짠맛을 좋아한다며 김밥을 소스에 듬뿍 찍어 먹는 필립. 입맛은 어릴 적 입맛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했다. 잘 먹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좌) 처음 만든 꼬마 김밥, (우) 사라, 필립네 집에 가져 간 꼬마 김밥
# 코리안 스시?
한국에서 김밥용 김을 아주 넉넉하게 보내주신 덕분에 냉동실에 넣어두고 김밥을 계속 싸 먹어보기 시작하면서 김밥 실력도 나날이 늘어갔다. 얼마 전 쌍둥이 엄마가 김밥말이용 대나무 발도 하나 주어서 발을 이용해서 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냥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싸는 것이 훨씬 편했다.
얼마 전에 한국분께서 시애틀에 갈 때 사다 주신 귀한 단무지는 김밥 만들 때만 사용했다. 단무지가 없을 땐 오이를 그냥 채 썰어 넣거나 시간이 좀 있으면 오이를 설탕, 식초, 소금물에 잠시 절여 사용하면 된다. 김밥 햄으로 마트에서 많이 파는 왕 소시지를 사서 넣기도 하고 계란이나 어묵을 잔뜩 넣어서 만들어 보기도 했다. 김과 밥만 있으면 재료로 뭘 넣어서 말아도 뚝딱하고 맛있는 김밥이 탄생을 했다.
미국에서는 각자 음식을 싸서 모이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종종 모임 초대를 받을 때 머핀이나 쿠키 등 디저트를 만들어 갈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여유가 있을 땐 떡, 김치, 잡채, 김밥 등 한국 음식을 만들어 가기도 했다. 그동안 많은 한국 음식을 싸서 가지고 가봤지만단연 인기 있었던 한국 음식은 김밥이었다. 김밥은 먹기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너무 예쁘게 생겼다. 어떻게 이렇게 멋지게 만들었냐 등등 시식을 해 보기 전부터 칭찬을 받곤 했다.
김밥은 종종 스시라고 불렸다. 일본 음식인 스시는 미국에서 워낙 인기를 많이 끌고 있다. 스시의 한 종류인 노리 마끼(김 초밥)는 영락없이 김밥과 비슷해 보이기에 우리나라의 김밥을 코리안 스시라고 부르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럴 때면 나는 절대 김밥은 스시가 아니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속이 시원했다. 찾아보니 김밥과 스시의 차이점 중 하나는 밑간에 있다고 한다. 김밥은 참기름과 소금으로 밑간을 하지만 스시는 식초를 넣는다.
(좌) 캠핑장에 싸 간 김밥, (중) 귀한 어묵을 듬뿍 넣은 김밥, (우) 똘똘이가 제일 좋아하는 참치 계란 김밥
단무지를 안 넣고 만들어도 맛있는 김밥
# 욕심부린 김밥
몬태나 보즈만의 ISI 모임에서 만난 제니퍼와 크리스네 집에서도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제니퍼는 말레이시아 사람이고 크리스는 미국 사람. 아이가 세 명이 있는 이 친구들은 보즈만에 있는 동안 우리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 김밥 실력이 점점 늘어가면서 이번 제니퍼네 집에 갈 땐 김밥 속을 빵빵하게 넣은 푸짐한 김밥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김밥 재료로 마지막 남아있던 단무지와 햄, 계란, 오이, 당근, 시금치까지 모든 재료를 아낌없이 듬뿍 넣었다. 속을 많이 넣은 김밥은 생각보다 너무 두꺼워졌다. 하지만 한 번 말아서 꾹꾹 누른 김밥은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터질 듯 터지지 않은 김밥을 잘 담아서 랩을 잘 씌운 후 제니퍼네 집으로 향했다.
제니퍼가 준비한 음식은 닭꼬치였다. 닭 허벅지살에 양념을 한 후 꼬치에 끼워 그릴에 구운 요리여서 하나씩 빼먹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싸 간 김밥은 너무 맛있어 보인다며 함께 모인 친구들이 모두 호기심을 보였다. 커다란 접시에 담겨 있는 김밥은 보기에 참 좋았다. 그런데 재료를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았다. 크기가 너무 커서 한 입에 들어가지 못하는 김밥은 입으로 베어 먹는 순간 안의 재료가 우수수 떨어졌다.
김밥에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다. 김밥 몇 개는 젓가락으로 집자마자 옆구리가 터져 버리기도 했다. 김밥을 몇 번 싸 보면서 이제 좀 알겠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김밥의 길은 쉽지 않았다. 재료가 바깥으로 나온 김밥은 더 이상 김밥의 예쁜 자태를 뽐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숟가락으로 퍼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옆구리 터진 김밥도 맛은 좋았다. 김밥은 김밥이었다.
# 채식 김밥
몬태나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채식주의자도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두 명이 채식주의자이시다. 한 분은 고기와 생선은 물론 우유나 계란도 안 먹는 채식주의자, 한 분은 고기와 생선만 안 먹고 유제품은 먹은 채식주의자이셨다.
똘똘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 매일 하교 무렵 아이 픽업을 하기 위해 많은 학부모들이 운동장으로 모였다. 이때 처음 만난 스캇은 똘똘이와 같은 반 아이인 잭의 아빠이다. 스캇은 아시아에 가 본 적은 없지만 한국 영화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음식 등 아시아 음식을 즐겨 먹는 친구였다. 스캇은 어머니인 수잔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종종 스캇이 바쁠 땐 잭 할머니이신 수잔이 픽업을 하러 학교로 오셨다.
가끔 뵙는 수잔이었지만 잭과 똘똘이가 친하게 지내니 나와도 대화할 거리가 많았다. 학교에 오실 때마다 대화도 자주 나누고 근황도 물으며 지냈다. 수잔께서는 유제품도 안 드시는 채식주의자셨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수잔께서는 우리 가족을 크리스마스 디너에 초대해 주셨다. 내가 선택한 메뉴는 역시나 김밥! 김밥의 좋은 점은 속 재료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채식주의자이시니 햄과 계란 대신 버섯을 양념해서 볶은 후 넣었다.
수잔네 집에는 다섯 가정이 모였고 우리만 외국인 가정이었다. 모두들 푸짐해 보이는 음식을 가지고 오셨는데 재료가 모두 채식이라고 해서 신기했다. 고기 볶음, 생선 튀김과 똑같이 생긴 음식들도 모두 콩으로 만든 요리였다. 김밥은 그중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다 먹은 후 열 개 이상 김밥이 남았는데 스캇은 자기에게 주고 가면 내일 아침에 먹고 싶다고 해서 다 드리고 집으로 왔다. 남은 김밥은 그 다음날 먹어도 맛있다는 걸 스캇은 알고 있었나 보다.
볶은 표고버섯을 햄, 계란 대신 넣은 채식 김밥
# 김밥 도시락
몬태나로 이사를 온 이후부터 거의 매일 도시락을 싸가고 있는 남편. 미국에서한국의 문화와 다른 점 중 하나는 많은 직장인들이 모두 점심을 대충(?) 먹는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근처 식당이나 구내식당으로 사람들이 함께 가서 점심을 먹는 문화를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 와서 혼자 점심을 먹곤 한다.
김밥은 도시락용으로도 최고의 메뉴이다. 김밥을 싸려면 시간이 다소 걸리므로 매일 먹고 싶어도 자주 김밥을 싸 줄 순 없다. 하지만 가끔 스페셜로 김밥을 싸서 먹고 싶은 날엔 도시락에도 김밥을 싸서 넣는다. 김밥 재료로는 뭐든지 좋다. 예전에 상추를 처음 시도해 보았는데 상큼한 상추와 김의 맛이 잘 어우러져서 상당히 괜찮았다. 게맛살이 많을 땐 게맛살을 잔뜩 넣어서 김밥을 만들기도 한다. 역시 김밥은 도시락으로도 그만, 포트럭 파티 메뉴로도 그만이다.
몬태나로 이사를 오고 나서 김밥용 김을 한국에서 받은 이후 한동안 신나게 김밥을 만들었다. 이제는 좀 시들해졌다고 해야 할까? 팬데믹 때문에 포트럭 모임을 갖지 못한 지도 일 년이 넘었다. 우리만 먹고자 김밥을 말게 되면 자꾸 과식을 하게 되어서 요즘엔 조금 자제 중이다.
김밥 사진을 계속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안 되겠다. 요즘 김밥을 몇 달 쉬었는데 아무래도 딱 한 봉지 남은 김을 꺼내야겠다. 단무지와 햄은 없지만 간단한 김밥이라도 만들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