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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형준 Dec 29. 2022

서핑 일기_05

생각하는 겨울 서핑 : 뭘? 파도를. 

겨울 서핑은 생각만큼 춥지는 않다. 

물론 고성능의 겨울용 슈트와 보온을 위한 이너웨어까지 입었을 때 이야기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포항은 기온이 따뜻한 편이다. 

그래서 난 1월까지는 후드(이목구비만 빼꼼 나오게 만든 모자)는 써도 장갑과 부츠는 잘 신지 않는 편이다.


바다 수온은 12월에는 15도 정도이고, 1월에는 더 떨어지지만 1월까지는 여전히 '물이 뜨뜻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에 충분히 겨울 서핑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2월 중순쯤 되면 바다도 온기를 잃어간다. 그러면 물 밖과 안이 모두 추운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견디기가 좀 어렵다. 선셋 서핑을 즐기기에도 무리가 있을 정도로 춥다.


어제는 오후 늦게 바다에 들어가 서핑을 즐겼는데, 한 시간도 못 되어서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간 쌓인 슬럼프들을 좀 극복한 뒤 오늘 다시 연습에 임했다. 


선생님의 코칭 한마디를 보드 위에 올린 채로 바다로 입수했다. 

오늘 오전에는 서퍼가 2명뿐이어서 한가로운 분위기였다. 

코칭 미션은 '남이 타려고 하면 양보하고 다투지 말아라. 대신 지나가는 파도를 보면서 어떻게 탈지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라'였다. 타는 것보다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담 없이 바다로 나갔다. 파고는 0.9m 정도에 바람은 꽤 부는 편이었다.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아직 온기가 남은 겨울 낮 바다가 나를 반겼다. 상쾌하고 짭짤한 바닷바람은 언제 맡아도 좋다.

오늘의 코칭 멘트는 나에게 '타야만 한다', '잘 타는 사람에 뒤지지 않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줄여주었다. 또 '나도 큰 파도 탈 수 있다고!'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무너뜨려주었다. 이전에는 무조건 큰 파도를 보면 달려들고 싶었달까. 무모한 시절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탈 수조차 없었다.


대신 나는 라인업에 나가 최대 피크(하나의 파도 중 가장 높은 곳)가 있는 구간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파도가 왔을 때 다른 서퍼가 타려고 하면 그냥 파도를 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저 파도는 어떻게 타야 타질까?' 막무가내로 파도에 몸을 던지던 내게 '파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이자 경험이었다.


파도를 생각하는 것은 점차 효과를 발휘했다.

탈 파도와 안 탈 파도가 구분되기 시작했고, 

안 탈 파도 중에서도 특정 지점에서 타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담 없이 양보한 뒤 나만의 파도가 오면 파도를 잡아 탔다. 


슝~ 어? 이건 뭐지?

테이크 오프 후 우측 사이드로 타고 나가다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밀어주는 파워가 줄기 시작해서 왼쪽을 보고 방향을 바꾸었는데 이미 늦었다.

하지만 나는 파워존에 머물러 있었다.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좀 더 확실히 파워존을 느낀 건 다음 시도에서였다. 

저 멀리서 큼직한 파도가 오는데, 피크는 절대로 탈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대신 우측 숄더를 타보자는 계획으로, 보드 방향을 해변에서 약간 우측 방향으로 틀고

패들링을 시작했다. 그렇게 숄더 타는 법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또 사이드로 향하다가 바로 파도를 잡는 것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숄더를 탈 때는 다른 때보다 밀어주는 파워가 막강했다.

굳이 앉아서 속도를 낼 필요도 없이 꼿꼿이 서있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파워가 줄어들며 뒤늦게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역시 실패.

하지만 정확히 파워존 구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 여기서 잘 돌려서 다시 파워존으로 들어가면 영상에서나 보아 오던 그 장면이 나올지도?'라는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오전 세션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힘 안 들이고 부드럽게 잘 탔다. 


하지만 오후의 바다는 달라지고 있었다. 

바람이 더 강해지면서 파도가 일시에 접히는 덤퍼형 파도가 많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나도 파도를 잡지 못해 끙끙 앓게 되었다.


오후는 겨우 돌아다니면서 작은 파도를 타고, 파도를 양보하고 생각에 잠기는 단계를 반복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연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오전에 먼저 들어가 있던 롱보더 한 분이 바다에서 명상을 하듯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서핑을 하고 있었는데, 

오후에 나도 생각에 잠기며 그분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거칠어진 성난 바다가 보내는 파도들을 어떻게든 넘어가 보려 허덕이다가도,

갑자기 잠잠해진 채로 저 멀리 수평선 노을을 보여주는 바다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확실한 것은 '파도를 어떻게 탈지 생각하는 것'은 필수적인 학습 과정이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몇 달 동안 이해되지 않던 방법이 쑥 튀어나오는 신기한 방법이다. 


그래서 서핑은 매력적이고, 겨울 바다는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바다라는 대자연 위에서 뛰노는 나 자신이 매 순간 사랑스럽고 또 마음에 든다.

그래서 서핑이 잘 안 될 때도 이 즐거움 하나로 버틸 수 있다.

작년 겨울 서핑할 때는 행인 분들이 '안 추워요?'하고 꼭 한 번씩은 물어보셨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안 물어보셔서 오늘은 없으려나 하던 찰나에

어머니들 무리 중 한 분께서 '안 추워요?' 물어보신다. 

난 '안 춥습니다' 하고 웃으며 바다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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