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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망원망원 16화

별다른 것도 하지 않았는데 연말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by 김슬기


작년의 오늘 나는 방콕에 머물며 원래 귀국일에서 일주일 가량을 뒤로 미룬 후 한 달을 보냈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연장할 수 없어 잠시 다른 빌라로 옮겨 햇살이 내리쬐는 루프탑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며 보냈는데, 올해는 히터와 전기장판을 틀고 담요를 뒤집어쓴 강아지와 함께 고구마를 먹고 있다. 방콕은 이제 기억 속에 담아둔 채로.


그립나요



올해는 이사와 새 동네에 적응하는 것 말고는 유독 별달리 한 게 없는 느낌이다. 상반기는 정말 이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매주 집을 보러 다녔고, 이사 업체와 청소 업체를 계약했고, 한 달간 주말마다 페인트칠을 하러 다녔고, 가구들과 커튼을 주문했다. 그렇게 이사를 마치니 2분기가 지나있었고, 상반기 업무 평가서를 제출했고, 강아지와 동네 이곳저곳과 한강을 쏘다녔다. 여름엔 밖에 나갔다간 그저 물미역마냥 흐느적댈 뿐 영 맥을 추릴 수가 없어 집과 마트만을 오갔고 가을은 여기저기서 빵을 사 먹는 사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이제 꽤나 날씨가 추워져 망원시장에서 생굴을 사 먹으며 매생이철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연말인 것이다. 이렇게 이사 빼고는 이렇다 할만한 일 없이 한 해를 보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아무 일이 없어서, 그저 잔잔한 바다같이 지나간 한 해라서 다행인 걸까?


확실히 20대의 패기는 유성우처럼 잠깐 반짝인 후 져버린 지 오래,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다가도 저녁 뭐 먹지를 고민하며 현실에 다시 안주하는 나날의 반복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아니라면 아닐 건 또 뭔지. 뭔가 뾰족한 수는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지금 사는 게 뭐 어때서 싶은 변덕들로 가득한 일상. 관심 있는 분야로 창업을 하고 싶으면서도, 잠시 프리랜서로 지내며 한없이 느꼈던 고정 수입의 중요성이 여전히 강렬히도 머리에 박혀 웬만해서는 잊을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하염없이 망설일 뿐이다. 내년이라고 뭐 달라질 것 같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에 한편으로는 슬픔이라는 감정에까지 가닿는 것도 같다.


한 해를 이렇게, 별 소득은 없지만 그나마 잔잔하게 마무리한다. 오늘 저녁은 방콕 쌩차이 포차나에서 먹었던 잊을 수 없는 굴 볶음 요리를 재현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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