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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망원망원 15화

폭설로 타이중에 갇힐뻔한 날

역시 망원이 최고야

by 김슬기


첫 대만 여행은 2016년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아날로그적인 것에 꽤나 빠져있어 유심을 구매하지 않은 채 와이파이가 되는 환경에서만 핸드폰을 확인하며 여행하는 것을 즐겼고 역시나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물씬 배어있는 타이베이를 마음껏 즐겼다. 그러던 어느 저녁, 당시 대만 여행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망고 맥주를 몇 캔 사서 숙소에서 첫 캔을 따 몇 모금을 마셨을까,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려오는 레일 조명이 살짝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다. 가만히 있던 조명이 불어오는 바람도 없이 저 혼자 흔들리는 것은 아마도 태어나 처음 본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내 여행일지를 적고 있던 노트마저 테이블 위에서 흔들리는 게 아닌가.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지진이구나. 나는 혼비백산해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와이파이가 되지 않으면 있으나 마나 한 핸드폰을 붙잡고 숙소 로비로 다급하게 뛰어 내려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투숙객들도 보였다. 잠옷바람의 투숙객들도 있었다. 모두가 혼이 쏙 빠진 상태로 긴 유리창 너머 미세하게 흔들리는 거리를, 그 위를 아무 일 없다는 듯 핸드폰을 보며 친구와 수다를 떨며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이며 걸어가는 대만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업무를 하며 놀란 투숙객들의 전화를 태연하게 받고 있는 호텔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곧 흔들림은 멈췄지만 나는 태어나 처음 겪는 지진에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있는데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생활을 이어갔던 현지인들의 태도와 나의 혼비백산했던 감정 간의 괴리에 퍽 놀랐으며 두려움마저 느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대만을 다시 간다는 것은 생각 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살았다.



여행객인척 인천공항 찍어보기


그런데 그놈의 인스타 릴스가 뭔지.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나는 하염없이 릴스를 보며 조금이라도 잠들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멍청한 짓을 종종 하는데 갑자기 항공권이 저렴하면서 멀지 않은 도시들을 줄줄이 소개하는 릴스가 나왔고 거기에 타이중이 있었다. 한 번도 가고 싶다는 생각은커녕 존재조차 잘 몰랐던 도시. 마침 쓰지 못한 연차가 남아돌아 어디든 어떻게든 좀 가자 싶었던 찰나였다. 바로 항공권을 끊었고 약 2주 뒤 나는 타이중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치 한국의 대전 같구나, 놀랍게도 인도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다시 생기고를 반복하는구나, 6월에 왔을 때는 더워서 정말 딱 죽겠다 싶었는데 11월의 대만은 어쩔 땐 춥기까지 하구나, 각종 향신료에 강한 편인 줄 알았는데 대만 음식 특유의 향은 너무 힘들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여러 날을 보낸 뒤 드디어 귀국날이 되었는데, 숙취에 젖은 빨래처럼 하염없이 침대 위에 늘어지다 핸드폰을 보니 갑자기, 난데없이 결항이라는 것이다.



푸르르기만 했던 타이중


결항이라는 단어는 말로만 들었지 이게 실제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결항 소식을 받아보자마자 든 생각은 슬프도록 현실적이게 내일 출근 어쩌지였다. 그래서 일단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결항 확인서 먼저 다운받은 후 팀장에게 알렸다. 그다음 생각은 현재 머물고 있는 숙소에 하룻밤을 더 머물 수 있는지였다. 숙박 사이트를 확인해 보니 객실 마감이었다. 주변의 다른 숙소를 알아보다가, 결항으로 인해 대체 항공편을 제공한다던지 하는 항공사로부터의 어떠한 제스처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항공사 사이트에 들어가 여기저기 살폈으나 환불을 받아라, 자동 환불은 불가하니 꼭 네가 직접 연락해 환불을 받아라 하는 지독히 불친절한 멘트만 보일 뿐이었다. 이 문제는 한국에 가서 해결하기로 하고 다시 주변 숙소를 알아보다가 문득 내가 타이중에 하루를 더 머물고 싶은지 의문이 들었다. 뭐, 돌아가는 항공편이 아예 씨가 말랐다면 모를까 나는 굳이 굳이 타이중에 하루를 더 있고 싶지는 않았다. 찾아보니 탑승 예정이었던 결항된 항공편과 약 30분 차이로 인천행 항공편이 있었다. 둘 다 국적기인데 왜 내 항공편만 취소인지, 저가 항공은 어쩔 수 없는 건지 분한 마음이 들었으나 미래에도 비행시간이 짧은 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저가 항공을 택하겠지.



일월담행 버스를 기다리며



한국에서 미리 왕복으로 예약한 항공권보다 약 7만 원 더 비싸게 당일 편도 귀국행 비행기를 끊고 나는 타이중의 마지막 날 풍경을 담아보고자 숙소에 짐을 맡기고 나섰으나 그다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내 모든 신경은 귀국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향하여, 그와 관련되지 않은 다른 기억들은 모두 조각조각 부서져 힘을 잃고 일부 빛을 바랬다. 그게 설령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타이중의 기억일지라도. 점심으로 주문했던 새우 완자와 우육면 중 새우 완자가 탱글 한 게 시키길 잘했다는 것은 기억나지만 맛에 대한 기억은 온데간데없는가 하면 식후 들렀던 카페에서 바리스타들의 정성과 열정에 감명받았던 기억의 뒤편에는 그래서 커피 맛이 어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 식이다.





혹시나 비행 스케줄에 변동이 생길까 코딱지만 한 타이중 공항에 비행시간 보다 3시간이나 일찍 도착하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동양인 할아버지 두 분이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Sogo 백화점에 어떻게 가느냐고.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현지인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고 답했으나 그들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바람에 나는 구글맵을 켜 여기서 3km 떨어져 있으며 몇 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난데없이 한국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한국분들이셨어요? 묻는 나에게 한국인이었냐고 반색을 하며 본격적으로 질문 공세를 쏟아부었기에 나로서 할 수 있는 대답은 나름대로 다 했다. 보아하니 그들도 나와 같은 항공편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나와 할아버지 둘은 '왜 벌써 공항에 가느냐/비행기가 몇 신데 지금 백화점을 들르시냐'로 서로 의아해하며 각자 갈 길을 떠났다.


공항으로 가는 길, 항공편 지연에 대한 문자가 왔다. 나는 이마저도 취소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몹시 초조해지는 한편 나와 같은 항공편으로 귀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유니폼까지 갖춰 입은 시끌벅적한 초등학생 야구단들 사이에서 과연 조용히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 그나마 비행시간이 짧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한 번에 들었다. 비행기는 지연에 지연을 거듭한 끝에 천만다행으로 탑승을 시작했고 앞서 할아버지 두 분은 심지어 나보다 먼저 탑승을 마쳤다. 관록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도착해 공항을 지나 공항철도와 지하철과 지하철 역을 지나 드디어 망원동에 도착한 나는 한동안은, 못해도 당분간은 아무 데도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칼바람조차 포근하게 느껴지던 하얗고 까만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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