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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Oct 29. 2024

"네가 내향형 체육인일 리가?"

그래, 뭔가 달라진 것 같다

누가 내게 MBTI를 물어볼 때마다 I라고, INFP라고 답하면 다들 매우 놀란다. 모두가 확신에 차서 "완전 외향인으로 보이는데요? 완전 계획형으로 보이는데?"라고 소리친다. 사실 그렇다. 내가 봐도 밖(?)에서의 나는 대단히 외향적이고 계획적인 인간으로 보인다. 사무실 동료는 내게 혹시 추구미가 I인 거 아니냐고, I호소인 아니냐고 매우 의심스러워했다. 


사실 MBTI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운동을 시작하고 난 뒤의 내가 예전과 매우 크게 대단히 달라졌다는 걸 확실히 느낀다. 내가 스스로를 내향인이라고 믿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삶의 많은 것들을 '귀찮아'한다. 일어나는 것도 귀찮고, 씻는 것도 귀찮고, 먹는 것도 귀찮고, 일하는 건 말해 뭐해, 밖에 나가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만나서 뭘 하는 것도 귀찮았다. 

뭔가를 시작해보려고 하면 모든 것이 너무나 까마득했다. 아니, 무엇보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게 엄청나게 큰일이었다. 한때는 극심한 우울감 때문에 침대와 한몸이 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우울증이 나아졌을 때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걸 '내향형 인간'으로 정의했다. 사실은 그게 반쯤 틀렸다는 걸 안다. 나는 하기 싫은 것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의욕이 없었고, 에너지가 없었고, 실행기능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MBTI 검사 같은 걸 하면 당연히 I가 나오지. 


특히나 무언가를 조직하는 일이라면 지독히도 싫었다. 세상에 나 하나 움직이는 것도 이렇게 귀찮은데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다고?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테니스 랠리를 하고 싶어서 직접 그 빡빡한 코케팅에 도전해 코트를 예약하고 사람을 모으고 랠리 멤버 단톡방까지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 

"아, 그러니까 클럽을 만드신 거네요?"

"아, 클럽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주 만나는 분들이랑 단톡방을 만들었죠. 하하."

오늘 새로 만난 랠리 멤버를 단톡방에 초대했는데 그분이 '클럽'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정식으로 무슨무슨테니스클럽이라고 명한 건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정해진 멤버들이 비정기적이지만 자주 모여 테니스를 치는 게 클럽이 아니면 뭔가 싶기도 하고.(그렇다고 진짜 클럽을 만들 생각은 없다. 나는 항상 느슨한 거리와 구속력 없는 관계를 지향하므로) 


얼마 전에는 풋살 개인 연습을 하고 싶은 마음에 무료구장을 예약해 지인 둘을 꼬셔서 단촐하게 연습을 했다. 한남역 고가도로 밑에 있는 아담한 풋살장은 셋이서 공을 차기에 딱이었고, 서늘한 여름 바람이 쌀랑쌀랑 부는 가운데 정면으로 한강이 촤르르 펼쳐졌다. 우리는 강바람을 맞으며 드리블, 트래핑, 슈팅 같은 걸 우리들 마음대로 연습하고 돌아왔다. 이때 용기를 얻은 나는 또 혼자 월드컵경기장 풋살구장을 예약해버렸다. 그런데 이곳은 정규 규격의 풋살장이고 몇 만 원의 대관료도 있어서 둘셋 모아가지고는 안 되겠더라. 

1) 내가 아는 사람 2) 풋살을 하는 사람 3) 풋살을 해보고 싶었던 사람 

1,2,3을 모두 긁어 모아 기어이 10명을 만들었다. 풋살스승 P님을 모셔와 훈련프로그램 진행까지 부탁했고, 5:5로 시합도 했다. 으하하 세상에, 어찌나 재밌고 뿌듯하던지! 내게 자꾸만 꿈과 희망과 용기가... 아니 실행력과 추진력이 생기고 있었다.


최근에는 여성단체에서 진행하는 풋살팀을 하게 됐는데 단기팀이라서 훈련도 6주밖에 못하고, 연습 장소도 좁은 실내구장인 데다가, 다른 팀과 매치도 한번 못해보는데, 대회에 나간다니 가심이 답답시러웠다... 아아아아... 매치 경험도 없이 대회라니, 아무리 친선 목적의 대회라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구장에서 정식으로 시합은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아아아아 하다가 또 구장을 예약해버렸다. 일단 구장을 잡자. 그리고 대회 전에 친선경기를 추진해보자! 우리 팀과 시합을 해줄 팀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이리저리 알아봤다. 상대 팀에서도 최소 5인 이상은 모여야 하는지라 친선팀을 찾기는 쉽지 않았지만 이케저케 지인들의 도움으로 결국 섭외에 성공했다. 그것도 두 팀이나! 친선경기를 삼파전으로 하는 사람들이 어딨어요. 여깄어요. 까르륵.


매치 경험을 쌓을 수 있어서 좋았고, 시합 자체도 너무 재미있었고,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과거의 나였다면, 설령 이 모든 걸 진행했다 하더라도 과정 중에 이미 지쳐서 방전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또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좋아하는 걸 하니까 그저 재밌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운동뿐만 아니라 일상 전반에서 나의 태도가 어딘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제는 누워서 생각하지 않는다. '누워서 어떤 것을 한다고 생각하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한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물론 이것은 ADHD 조절약인 콘서타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무엇을 할 때 그것이 그저 까마득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운동이란 건 정말 정직해서 하는 만큼 변화를 보여준다. 물론 아주 천천히. 그것은 신체적인 변화(체력이 좋아진다든지, 심폐지구력이 좋아진다든지, 회복력이 좋아진다든지, 근육량이 는다든지...)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근력을 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운동이 좋아졌지만 운동을 하러 나가는 몸이 지금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건 아니다. 테니스 랠리가 잡히면 가기 직전까지 가기 싫어서 꿈틀거린다. 테니스장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피티받으러 헬스장에 가야 할 때도 30분 일찍 가서 스트레칭을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꼼지락꼼지락 게으름을 피운다. 풋살 일정이 있을 때도 아아아 사람들이랑 부대끼고 또 2시간을 꼼짝없이 뛰어야 하는데 아아아아 귀찮은데 아아아아아 하는 생각을 하긴 한다. 풋살장을 덜컥 예약해버리고는 아 어떡하지? 어떻게 수습하지? 걱정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일단 하고 나면, 테니스를 치면, 웨이트를 하면, 풋살을 하면, 대단히 행복해진다는 걸 안다. 그래서 한다. 여전히 꾸물거리고, 게으르고, 몸은 무겁지만, 일단은 한다. 80평생 살면서(계속 바뀌는 고무줄 나이) 처음 경험하는 시절이다. 내게 이런 시절도 오다니. 오늘의 내 인생이 오늘도 믿기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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