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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Nov 05. 2024

승부욕이 없다고 누가 그래?

내가 그랬지

생애 첫 풋살대회, 바로 그것을 경험하고 돌아온 나는 분통이 터졌다.

지다니.

지다니.

지다니.

아니, 질 수 있지. 평소의 나였다면 사람이 당연히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지 허허 했을 것인데, 이상하게 분통이 터져서 정수리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시합에서 졌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전에, 내가 지키고 있던 골문을 뚫고 공이 휘-익 하고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헉...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쁘다고?


이번 대회에서 나는 골레이로(골키퍼)로 4경기를 뛰었다. 우리는 누가 골대를 지킬 것인가 대회 직전까지 고민하다가 1인당 8번의 슈팅을 막아보는 테스트를 했고, 그날따라 공이 자꾸 내 몸을 맞고 튕겨나가서....(?) 내가 주 골레이로에 당첨되었다. 특별히 반사신경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일단 날아오는 공을 무서워하진 않으니까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도 공이 높이 뜨면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거나 점프를 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던 걸 보면 나 어쩌면 잘할 수 있을지도?


...라는 생각을 왜 했을까. 대회 전 친선경기를 했는데 공을 막지 못하면 엄청난 허탈감이 들었다. 앗씨, 이걸 왜 못 막지? 앗씨, 이건 오른쪽인데! 앗씨, 손을 좀 더 빨리 올렸어야 했는데! 매 순간 공을 막지 못한 내 육신을 탓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버리진 않았다. 요즘의 나는 정신건강이 매우 건강한 상태이므로 아주 막연한 낙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아니라 '어떻게든 되겠지'에 가까운 기분이었달까. 물론 절대로 어떻게든 되지 않는다. 골레이로로서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도 못했고, 지식도 없고(유튜브로 겨우 검색해봤다), 신체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든 되겠나 이 바보멍충아.


골을 먹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더란 말이다. 시험공부 하나도 안 하고 시험 봐놓고 30점 받았다고 기분 나빠하는 꼴인데...(아니 근데 여러분, 시험공부 안 해도 점수 나오면 기분 나쁘지 않나요?) 어쨌든 그동안 나는 골 먹혔다고 분통 터지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왜냐! 그럴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골키퍼가 아니니까! 그 기분을 몰랐단 말이다...

내가 지켜야 할 영역이 딱 정해져 있는데 그걸 책임지지 못했다는 좌절감은 너무나 컸다. 풋살 또는 팀 스포츠는 원래 뭔가를 다같이 책임지는 종목이다. 그런데 골대를 지키는 건 좀 달랐다. 물론 경기 전체를 봤을 때 골키퍼와 필드플레이어가 함께 협동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골대를 지키는 건 아주 명확하게 골키퍼에게만 주어진 역할이다.


휘-익 소리를 내며 공이 얼굴 옆을 스치고 들어올 때, 나는 이 역할에 실패했다는 절망감에 온몸이 땅으로 꺼질 것 같았다. 필드에서는 내가 헛발질을 하거나 실수를 해도 그것이 반드시 실점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골키퍼는 정말 최최최최최종수비이기 때문에 골키퍼의 실수나 실패는 곧 실점이 되고 패배로 이어진다. 그 중요한 순간을 내 실수로 결판지어버렸다는 것이 나를 그토록 크게 좌절하게 만든 것이다.


이 대회는 사실 친선 목적이 강한, 모두가 평등한 운동장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즐겁게 뛰자는 취지의 아름다운 대회인데, 패배감이 이렇게 크다니. 이럴수가... 내게도 승부욕이 있었구나. 내게도 팀에 기여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구나. 내게도 팀에 폐 끼치고 싶지 않은 책임감이 있었구나. 풋살 재밌다 이얏호 와와 재밌다 천둥벌거숭이처럼 그저 해맑게 뛰어다니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내 안에 이런 면이 있었다고? 원래 있었는데 몰랐던 것인지, 풋살을 하다 보니 생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내게도 '이기고 싶은 마음'이 꿀렁이고 있던 모양이다.


첫 경기부터 4골이나 먹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료 휘슬이 울렸다. 뒤에 이어진 경기에서도 대패를 하진 않았지만 줄줄이 졌다. 근데 골을 먹혔을 때는 그렇게 울적하고 침울하던 마음이, 시합이 끝나고 경기장을 나서는 순간 싸악 사라졌다. 동료들이 웃고 있었다. 다들 웃으며 잘했다고 격려해주고 있으니 나 혼자 울상을 하고 있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

"뿌앵! 내가 못막았어! 미안해요! 뿌앵!!"

"괜찮아요!! 잘했어!! 진짜 잘했어!! 우리 진짜 다 잘했어!!"


너무 많이 져서, 너무 공격을 많이 당해서, 공을 막아야 할 위기가 많았고, 그 덕에 골키퍼로서 몸을 던질 기회가 많아져버렸고(우승팀은 골키퍼가 할 일이 별로 없었겠지...껄껄) 그래서인지 MVP로 선정되고 말았다. 페어플레이를 했다는 선정 이유를 들으니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어서 어리둥절. MVP 수상에 동료들이 너무 크게 기뻐해줘서 더더욱 몸둘 바를 몰랐지만, 어쨌거나 우리 팀에 상 하나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아니 골레이로 훈련을 받아봐야겠다. 내년에는 꼭 이기면서 웃을 거야. 나는 사실 이기고 싶은 사람이니까.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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