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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부리 Feb 25. 2021

탈영양사 계획 1탄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1)

[글을 읽으시기 전, 함께 들을 추천 bgm입니다. Afterglow-Ed Sheeran]



퇴근을 하고 친한 친구들을 만났다. 까맣게만 보이는 하늘이 실제론 진한 군청색이라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었더랬다. 그러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감각이 나를 깨웠다.


직장인들이 돈 버는 이유는 지하철이나 버스가 끊기기 전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도 택시를 탔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날씨가 많이 춥네요? 택시 잡는데 오래 걸리셨죠?”


말 건네는 솜씨가 꽤나 자연스러워 대화를 이어가도 괜찮은, 자기 말만 하지는 않으실 것 같은, 친절한 택시기사 분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알딸딸하니 취기도 살짝 올랐겠다 어떤 대화건 맞장구 칠 자신이 있었기에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네, 뭐 생각보단 오래 안 걸렸어요. 어플로 잡고 가게 안에서 기다리면 되니까요.”

“세상 참 좋아졌어요. 최근에 내 딸도 술 먹고 늦게 들어오길래 좀 혼냈더니 요새 택시 어플로 다 잡힌다고 늦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따님이 계세요?”

“네, 딸 하나, 아들 하나. 딸은 곧 결혼해요. 시집가서도 술 먹고 늦게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아주 신신당부를 했는데 들을 리가 없지.”


나 말고 다른 딸, 내 동생 말고 다른 아들을 가진 부모님에게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아드님은 여자 친구 있으세요?”

“그런 것 같던데~ 나한테 말을 안 하니 뭐 잘은 모르겠는데, 주말마다 나가는 것 보면 있는 것 같아요.”

“혹시 기사님은 아드님 여자 친구가 영양사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


회심의 질문이었다.


“영양사? 좋죠~ 여자 직업으로는 그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은데, 영양사세요?”

“네, 그런 셈이죠.”


타인에게 비치는 영양사의 이미지가 궁금했더랬다. 특히, 막연히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20대 끝자락에 나라는 사람을, 그리고 영양사라는 직업을 잘 모르는 사람의 의견이 궁금했다.


좋게 봐주신다니 감사했지만, 안타깝게도 마음에 와 닿지 않은 평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영양사’라는 직업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던 불만 때문에 칭찬을 칭찬으로 못 받아들인 내 탓이었던 듯싶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택시에서 내린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진한 군청색이 되어 거진 검은색에 가까워진 밤하늘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 왜 영양사였더라..’



고등학생 시절, 내가 원하던 진로는 패션 MD였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소녀는 서울로 상경해 패션 공부를 하고 차가운 도시 여자 직장인이 되어 한국 패션계를 아우르는 거창한 인물이 되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이 원대한 꿈 중 일부는 성공한 것 같기도 하다.


먼저, 20살 서울로 대학교를 진학해 ‘서울로 상경’하는 것은 성공했다. 그리고 ‘패션’ 공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식품과 영양’에 대해 공부는 했고, ‘차가운’은 빼고 ‘도시 여자 직장인’은 됐다.


하나의 문장으로 나열되던 꿈이 살면서 군데군데 이루어지고 있다. 패션도.. 여전히 옷에 관심이 많고, 쉴 새 없이 사들이고 있으니-가끔 옷 잘 입는다는 소리도 듣는 것 같고-성공은 한 건가?


무튼, 내신보다 수능에 자신 있던 고3 수험생의 나는 등급제의 쓴맛을 한 껏 맛본 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교 ‘자연과학부’로 입학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학부로 입학해 2학년에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애초에 어머니와 언니의 추천으로 식품영양학과를 염두에 두고 진학했다. 물론 의상학과에 가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학교 의상학과가 다 떨어져서’다.


사실 원하던 대학교의 의상학과가 가고 싶어서 재수를 하려고 했다. 근데 1년간의 수험생활을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서울로 학교 가서 편입 준비해.’라는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의상학과고 뭐고 스무 살인데, 서울 가서 도시 생활을 누리며 자유롭게 저 청춘의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운명을 결정짓고 서울로 상경하였고, 약속해주신 데로 부모님께서는 나의 편입을 지원해주셨다. 이것이 나의 “탈영양사 계획 1탄”이다.


대학생활 2년을 보내고 22살이 되어 편입을 하기 위해 1년 휴학을 했다. 그런데 분명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 좀 했던 것 같은데, 서울서 놀고먹는 대학생활 좀 했다고 공부하는 법을 다 까먹었는지 그렇게 공부가 잘 되질 않았다. 사실 학원을 다니면서 초반에 성적이 꽤 좋은 편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큰 단점이 편입을 준비하면서 드러나버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장기전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보통 대개 입시생들이 그러하듯 편입 준비생들도 잠자는 시간 빼고는 정말 '공부만' 한다. 나도 처음 몇 달은 할만했는데 6개월이 넘어가니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영어를 정말 깊게, 깊어도 너무 깊게 공부하다 보니 나중엔 영어가 쳐다보기도 싫었다. 심지어 한국말로도 어려운 논리적 추론을 영어로 하고 미국인도 안쓸 것 같은, 아니 모를 것 같은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하는 시험이 편입이다.



그렇다고 얻은 게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영어만 공부하다 보니 실력이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긴 했다. 공부를 하는 동안 토익은 기본이며 공무원 영어, 토플, 텝스, 시중에 나와있는 각종 영어 관련 문제는 다 풀어보게 되는데 덕분에 지금까지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시험영어 성적'을 보유하게 되었다.(실전 회화는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그렇게 1년의 편입 준비 끝에 나는 서울의 내놓라 하는 유수의 대학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 기준에 이 정도 대학이면 다닐만할 것 같은, 이름 있는 대학교만 골라 시험을 봤다. 제야의 고수들은 모두 은둔해 있는 것이 학계의 정설인지, 편입학원에서는 잘 안보이던 고수들이 시험장에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의 이 ‘탈영양사 계획 1탄’은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난 다시 나에게 식품과 영양을 가르쳐주실 교수님들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사진출처 : pinterest 'stella on twitter'@ethereald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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