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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성 Sep 09. 2023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스러운 식사 '전' 시간

7월의 열한 번째 날

 저녁 시간 전 친구들과 두루 모여 T가 일하는 카페에 갔다. 이탈리아에는 퍽 이곳과 잘 어울리는 식문화가 있다. ‘아페리티보(Aperitivo)’. 식사 전 식전 술을 즐기는 문화다. 학교생활을 할 때도, 사회생활을 할 때도 정해진 식사 시간 내에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던 나에게는 생소한 낭만으로 다가오는 문화이다. 식사 전 30분- 1시간을 동료, 가족, 애인과 도란도란 마주 앉아 잔을 기울이고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안주 삼아 곁들인다. 점심, 저녁 모두 식사 전이라면 아페리티보가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특히 평일에는 저녁 시간에 아페리티보를 즐기는 경우가 잦다.


 아페리티보 시간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와인보다 주로 이곳의 와인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을 마신다. 이탈리아 문화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와인을 베이스로 한 대표적인 칵테일로 이탈리아의 스프릿츠(Spritz Aperol)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스프릿츠 외에도 후고(Hugo) 역시 대표적인 아페리티보 음료 중 하나이다. 또한, 나처럼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무알코올 칵테일(analcolico alla frutta)를 마신다. 이런 식전주는 식사 전 식욕을 돋우는 역할을 해준다고 그런다. 사실 아페리티보로 식욕을 돋우는 효과는 잘 모르겠고, 그냥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가 좋다. 카페에 들어가 아페리티보를 시키면, 대부분 기본적으로 아페리티보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를 준다. 주로 비스킷이나 올리브 절임이다. 우리나라 술집에서 맥주를 시키면 간단한 안주로 뻥튀기나 과자를 주는 것과 비슷하다. 올리브 절임은 이곳에 와서 처음 먹어 봤는데,  절여진 초록 올리브는 새콤하고 중독성 있는 맛이다.  


 카페에 도착하고 우리는 T를 기다렸다. 그녀는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여유로워진 T가 인사를 건넸다.

“Ciao, ragazzi!(어이, 친구들 안녕!)”

“사람 많아서 정신없겠다.”

“저녁 시간 전에는 항상 이렇지, 뭐. 괜찮아.”

“밖의 테이블에 앉아도 돼?”

“그럼.”

우리는 작은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앉았다. T는 주문받으러 와서는 우리와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T를 재촉하는 손님은 없었다. 사장님도 전혀 눈치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자꾸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던 경험이 떠올라 눈치를 본 건 나뿐인 거 같았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친구들은 각각 마실 음료를 주문했다.

“음…. 나는 무알콜 칵테일이랑 작은 아이스크림 케이크 하나 줘.”

“아이스크림 케이크 정말 좋아하는구나?”

매번 같은 디저트를 시키는 나에게 T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맛있잖아.”

별수 없다는 과장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주문을 마쳤다. 실제로 T가 일하는 카페 디저트들은 이 근방 여느 카페 디저트보다 월등하게 맛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페리티보를 즐기는 시간일지라도 디저트를 생략할 수 없다. 동그란 사과같이 생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처음 먹었던 날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겉면의 붉고 진득한 시럽부터, 속의 화이트초콜릿 크림까지. 입 안에서 환희가 부드럽게 휘몰아친다.  젤라토를 비롯하여 모든 디저트는 중후한 나이의 남자 사장님이 혼자 만드시는 작품이다. 카페 한편에 비밀스러운 주방이 있는데, 사장님은 종일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시며 다양한 디저트들을 만드신다. 디저트를 만드는 그 주방에는 사장님의 아내도, 자녀들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모든 디저트는 사장님만의 비밀 레시피로 만들어진다. 수많은 작품 중 최고의 명작으로는 단연 최근 사랑에 빠진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꼽고 싶다.  빨간 시럽은 아주 진득하고 부드러운 화이트초콜릿. 그 안은 상큼한 딸기 맛 젤라토와 진하고 밀도 높은 크림치즈와 요거트, 바닐라가 잘 어우러진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이라고 하기에는 그 이상으로 특별하고 부드러운 맛이다. 진득하고 차가운 크림을 먹는 느낌이라고 묘사하면, 그 자체가 ‘아이스크림’이겠지만, 어쨌든 아이스크림보다는 ‘진득하고 차가운 크림’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맛이다. 늘 베이킹에 열정적인 나는 사장님께 이러한 디저트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무료 노동으로 제자의 영광을 누리려는 건 욕심일까?”

친구들에게 물었다.

“누구, 너?”

친구들은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매일 여기에서 보수 없는 알바를 한다고 제안하고, 대신 디저트 만드는 기술을 조금만 가르쳐 달라고 제안하면 어떨 거 같아?”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은 발칙한 제안이라며 웃어 젖혔고 곧이어 부추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가 ‘진짜로! 어떨 거 같아?’라는 말만 반복하던 와중에 여유를 되찾은 T가 우리의 테이블로 왔다.

“Ragazzi(친구들) 간간이 내 이름이 들리던데 무슨 열띤 토론을 하는 건데.”

발칙한 아이디어를 듣고 가장 크게 웃던 친구가 T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T도 웃기 시작했다.

“야, 우리 사장님은 디저트 만드는 일을 예술이라고 생각하셔. 그래서 가족들한테도 본인의 비법을 절대 알려주지 않는데 아무 상관없는 외국인한테 알려줄까?”

“안 알려 줄 거 같아.”

물어도 보기 전에 사장님의 확고한 대답을 들은 기분에 어쩐지 아쉬웠다. 배워 두면 인생의 격이 올라가는 맛의 디저트라 꼭 배우고 싶었지만, 사장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 갔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면, 꼭 누군가에게 사장님의 비밀 레시피를 전수해 주셔서 이 맛있는 디저트가 세상에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돌아가며 아무렇게나 던지는 대화 주제에 모두가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다. 아페리티보의 현장은 흡사 열띤 토론장의 모습 같았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럴까? 혹은 정말 아페리티보가 식욕을 돋운 걸까?

배가 고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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