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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성 Oct 28. 2023

가로등의 미소

한 줄기 가느다란 바람이 불면 아스팔트 도로 위로 향긋한 분홍빛 파도가 밀려왔어요. 긴 시간 동안 다시 만날 이 계절만을 기다린 봄바람과 벚꽃잎은 도로 위에서 멈출 줄 모르고 사랑스러운 왈츠를 추었어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벚나무 바로 뒤에는 가로등이 있었어요. 아스팔트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가로등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서로에게 인사하고 있었어요.


 오후 6시 30분이 됐어요.


“교대 시간이다. 난 이제 들어가 볼게, 다들 수고해!”  


시간을 확인한 태양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어요. 퇴근할 생각에 신이 난 태양은 여느 날과 같이 두 팔을 활짝 벌려 좌우로 휘저으며 가로등들에게 인사를 건넸어요. 태양이 긴 두 팔을 세차게 흔들자, 순식간에 온 하늘은 주황빛과 붉은빛, 그리고 금빛을 섞은 아리따운 수채화처럼 물들었어요.


사람들은 신이 난 태양이 퇴근하며 건네는 인사를 ‘노을’이라고 부른대요.

가로등들은 금빛 여운을 남긴 태양에게 인사하며 저마다 출근 준비를 시작했어요.


“태양이 건네주는 인사는 항상 기분을 좋게 만들어줘.”


가로등 8번은 기분 좋은 태양의 인사를 곱씹었어요. 그러고는 연거푸 부르르 소리를 내며 필라멘트 입술을 풀었어요. 주변에 있던 다른 가로등 친구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필라멘트 입술을 풀기 시작했어요. 매일 저녁, 태양이 퇴근하고 나면 어두워진 도로를 비추기 위해서 가로등들이 출근해요. 가로등들이 필라멘트 입술로 환한 미소를 지으면 그들의 얼굴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거든요. 가로등들은 미소로 밝힌 얼굴로 밤새 길을 환하게 지킨답니다.

“자! 다들 준비됐지? 오늘 하루도 힘 내보자.”

가로등 1번이 큰 소리를 내어 모두의 사기를 북돋웠고, 이에 이어 우렁찬 목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어요.


“하나, 둘, 셋!”


나란히 마주 서서 공손한 자세로 구호에 귀를 기울이던 가로등들은 가로등 1번이 ‘셋’을 세는 소리에 맞춰 활짝 웃었어요. 그러자 온 도로가 환하게 빛났습니다.


“오늘도 저희가 어두운 길을 밝게 비춰드리겠습니다.”


가로등들은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에게 인사 하며 업무를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은 어두워졌어요.


“이상하다, 오늘은 달님이 조금 늦으시나?”


가로등들은 아직 출근하지 않은 달을 기다리며 걱정했어요. 때마침, 저 멀리에서 달이 허겁지겁 달려 나왔어요. 달은 수줍은 얼굴로 인사했어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일찍 출근하셨네요.”

“달님, 오늘도 반가워요! 오늘은 달님이 반쪽만 빛을 낼 수 있는 날이니,  우리가 더 열심히 길을 밝혀볼게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보름이 되는 날에는 항상 달님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일하잖아요.”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흘렀어요. 하늘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졌어요.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가로등 5번은 일에 집중할 수 없었어요. 이상하게 요즘, 가로등 5번은 쉽게 피곤해져요. 가로등 5번은 너무나도 혼곤한 탓에 마음속으로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눈꺼풀에 살이 찐 걸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벌써 이렇게나 피곤한데, 아직 출근하고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네. 정말이지, 이건 믿을 수 없는 사실이야.’


가로등 5번은 시간을 확인하며 같은 생각만 곱씹었어요. 그러자 피로감은 눈덩이 불어나듯 커졌어요. 옆에 있던 가로등 동료들은 가로등 5번의 피로를 눈치채고,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그중에서도 가로등 5번을 제일 걱정하던 가로등 4번이 입을 열었어요.


“5번 씨, 요즘 너무 피곤해 보여요. 괜찮아요?”


이에 이어 가로등 6번, 그리고 맞은편에 있던 동료들도 진심 어린 걱정을 보탰어요.


“맞아요, 피로가 많이 쌓인 거 같아요.”

“아주 피곤하면 잠시라도 눈을 붙여보는 건 어때요? 우리가 있잖아요. 5번 씨가 잠시 쉰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를 믿어요.”


가로등 5번은 자신을 걱정하는 동료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힘을 내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일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아니에요, 다들 고생하는데 어떻게 저만 쉬어요. 우리 같이 퇴근까지 힘내요.”


가로등 5번은 눈꺼풀에 힘을 주며 졸음을 견뎠어요. 필라멘트 입술에도 힘을 주어 더 환한 미소로 길을 밝게 비추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요했던 피로가 폭풍처럼 몰려왔어요. 눈앞에 벚꽃잎들이 바람과 함께 왈츠를 추며 지나갔어요. 코 끝에는 그들이 지나가며 남긴 향긋한 향내가 스쳤어요. 꽃잎과 바람의 부드러운 춤사위를 본 가로등 5번의 머릿속에는 춤과 어울리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떠올린 그 노래의 선율이 얼마나 부드럽고 달콤한지, 어릴 적 아버지가 불러 주시던 자장가가 귓가에 맴도는 거 같았어요.  


팅-


오랜 시간 졸음과 사투하던 가로등 5번은 결국 잠과의 대결에서 패배했어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가로등 5번의 필라멘트 입술은 한순간에 힘이 풀렸어요. 그렇게 가로등 5번은 힘없는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을 잃었어요.  


“저런, 매우 피곤해 보이더니 결국 잠들었네요.”

“그러게요.”


가로등 5번을 지켜본 동료들은 곧바로 가로등 5번을 깨우지 않고, 잠시 쉴 수 있도록 두었어요. 30분이 흐르고 가로등 5번은 반짝 정신이 들어 눈을 떴어요.


“맙소사!”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가로등 5번은 잠에서 깨고 동료들에게 사과했어요.


“모두에게 너무 미안해요.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밝은 미소를 잃고 잠에 들었어요.”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지금은 조금 괜찮아졌어요?”


동료들은 사과하는 가로등 5번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가로등 1번이 좋은 의견을 내놓았어요.


“그러지 말고, 우리 번갈아 돌아가면서 조금씩 쉬는 거 어때요? 2번, 4번, 6번, …. 짝수 가로등이 잠시 쉴 때는 홀수 가로등이 길을 비추고, 홀수 가로등이 잠시 쉴 때는 짝수 가로등이 열심히 길을 비추는 거예요.”

가로등 1번의 제안을 들은 가로등들은 잠시 생각에 빠졌어요.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로등들은 하나둘 입을 모아 가로등 1번의 의견에 찬성했어요.


“좋은 의견인 거 같아요!”

“맞아요! 우리는 혼자 일하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동료가 있으니까 힘들 때는 잠시 쉬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날 저녁, 가로등들은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가로등 1번의 구호에 맞추어 연습했어요. 두 팀으로 나누어져 번갈아 가며 길을 비추다 보니 도로가 이전보다 살짝 어두워졌어요. 하지만, 자동차들이 길을 쌩쌩 달리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어요. 그날 이후로 가로등들은 적당한 휴식을 취하며 더 활기차고 즐거운 마음으로 긴 밤 동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가로등 친구들이 더 건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됐다니, 나는 너무 기뻐요. 그런데 어제는 우연히 사람들 곁으로 갔다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인지 여러분도 한번 들어 보실래요?


  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가 너무 출출했어요. ‘먹을 게 없을까?’싶어 주변을 살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마땅하게 먹을 것이 없더라고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때마침 저 아래 어떤 사람이 자동차 바깥으로 하얗고 기다란 과자를 내밀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과자를 먹기 위해서 힘차게 그곳으로 날아갔어요. 그렇지만 웬걸, 그건 과자가 아니었어요. 그건 살짝 뜨겁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막대기였어요. 실망한 나는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어요. 운전석 옆에 앉은 사람이 막대기 위에 앉은 나를 보고 무척이나 좋아하더라고요.


“어머! 네 담배 위에 아주 작은 새가 앉았어.”  


운전석 옆에 앉은 사람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러자,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람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어요.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빨리 사진 찍어.”


나는 속으로 ‘참새를 처음 보나?’라고 생각했어요. 평소에도 참새를 자주 볼 텐데, 나를 보고 사진까지 남기며 신난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 의아했거든요. 어쨌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자 바로 자리를 떠나기 좀 그렇더라고요. 그건 너무 깍쟁이 같잖아요. 냄새는 안 좋았지만 조금 더 앉아있는 건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더 앉아있기로 했어요. 그런데 글쎄 거기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줄 아세요?


“요즘에는 가로등을 다 켜 놓지 않고, 징검다리처럼 하나 건너 하나만 켜 놓는구나?”


신호등의 빨간불을 보고 멈춰 선 자동차의 운전자가 가로등 친구들을 보며 입을 열었어요.  


“전기세가 많이 올라서 그래.” 운전석 옆에 앉은 사람이 대답했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소리 내 웃었어요. 내 웃음 소리를 들은 사람들도 덩달아 같이 웃었어요. 가로등 친구들이 일하는 새로운 방식에 어떤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전기세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사람들이 너무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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