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나는 한국화교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국적을 갖지 못한 난민생활을 고집하여 왔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그들의 정서는 한국인을 너무 닮아 있다. 당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려하고 한국의 정을 표현할 줄 아는 한국 사람이었다. 오히려 조선족 교포에게서 느끼는 이질감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2만 명이 넘는 화교들은 다시 한국을 떠나고 있다. 제일교포가 일본에서 받는 차별을 생각한다면 답은 있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화교뿐만 아니라 외국이주민에 대한 법적차별과 사회적 차별이 제일교포에 비해서 더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부정적인 방식을 조선족 교포들이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것은 화교들과는 다른 기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그 핵심엔 인삼가게들이 있다. 그들은 중국산 인삼을 수입하여 저질의 홍삼을 국내산으로 둔갑하여 고가에 판매한다. 중국인들이 국내산 홍삼을 선호하지만 국내 농가에서 생산되는 홍삼은 그들을 통하여 관광시장에서 유통될 수가 없다. 이미 그들의 자본과 여행사와의 고리에 의해서 철저하게 독과점이 되어 통제를 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엮어진 저질화장품 가게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불법가이드가 성행하고 그들은 한국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없다. 단지 관광객을 대상으로 저질상품을 팔아 그들의 수익을 챙기는 졸렬한 장사꾼의 극치를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한국에서 세금을 낼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 당시는 나 역시 그들 속에서 뒤엉켜 헤매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사교육비의 증가는 1950년대의 베이붐세대 이후 우리 세대에 이르는 이기심이 낳은 결과이다. 인간이 함께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 남보다 우월하기를 누구나가 바란다. 평범한 소시민의 행복을 가르치지 못한다. 우리세대도 학교 등수는 있었다. 그 등수가 아픔이 된 많은 친구들이 있었음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학교등수에서 항상 자유로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등수에 의하여 줄을 세우는 사회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변별력을 분명히 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 되었고 행정 편의주의와 객관적인 정당성을 인위적으로 강요하기 위한 비인격적인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다. 소위 선진국을 흉내 내어 학교급식이란 것도 있었다. 대학졸업과 함께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누구나 자유로운 선택이 되었던 때도 경험했다. 내 주변의 친구들은 인류대학을 나온 주변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고시공부에 매달리기도 하고 대부분 대학원을 진학하며 유학을 떠나기도 하였다.
당시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서 있던 친구들은 오랜 군사정권에서 벗어난 민주정부의 출범과 함께 자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우리 세대는 당시 독재정권 속에 누렸던 우리의 풍요로움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치열한 투쟁의 대상이었던 군사독재의 압박 속에서 오히려 그 혜택을 받고 성장한 세대라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전면적인 사교육금지는 지방 고등학교를 다닌 우리들에게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었다.
지금은 제주도 전체를 다하여도 서울대 진학이 30명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당시 우리 학교에서만도 50명 이상이 서울대 진학을 하였으니 가히 지방 명문고라 할 수 있었다. 전체 540명중 유명대학을 포함하여 300명 이상이 서울로 진학했다. 그리고 우리와 경쟁을 하였던 또 다른 고등학교도 그 만큼 진학을 하였으니 내 친구들은 정말 많은 수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다.
새롭게 출범한 민주정권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모두에게 나누고자 복지정책에 중심을 두고 분배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어설픈 민주적 사고는 오히려 기득권의 경제 집중을 심화시켰고, 중소상인과 중소기업의 몰락을 가져오게 하였다. 계획경제에 익숙하고 이에 잘 순응하는 경제구조가 갑작스런 자유경제 구조 하에서 통제를 잃고 자유경제는 대자본의 탐욕적 논리수단으로 전락되어 결국 기존 독재 권력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순진한 권력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실체와 현실적인 행동양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자본의 독과점, 시장의 독과점은 결국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오고 있다. 그러한 독재의 혜택을 받은 우리세대는 오히려 가정경제를 방만하게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교육에 대한 지나친 지출과 생활비의 과도한 지출을 들 수 있다. 우리 세대는 누구나 서구의 귀족계급처럼 호화로움을 탐닉하며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대자본은 그러한 국민의 욕망을 부추기고 부를 축적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치열한 젊은 투쟁의 역사를 통하여 얻어낸 이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자본의 엄청난 권력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중산계층의 대중적인 개인자본이 사라지고 있다. 민주 정권 10년의 잘못은 대자본의 권력을 방치한 무지와 방임의 죄가 첫째인 것이었다. 이후 보수정권 4년은 그러한 독점 권력을 부채질하였다. 70년대 대기업 중심의 성장 중심으로 경제를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중산층이 살아날 수 있다고 착각을 하였다. 정부는 대한민국 사회가 이미 독점자본에 의한 지배구조가 완벽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그들의 성장이 사회에 나누어지리라는 것은 심각한 오판이다. 자본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재정부는 그들이 부패하였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독재의 명분이 그래도 전통적인 위민사상을 바탕으로 그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오히려 민주정권이 독점 자본을 권력화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고 그들과 타협을 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유통구조 개편이다. 유통의 단계구조를 줄인다는 사실이 국민에게 소비재를 싸게 구입하게 하고 가격경쟁을 유발시켜 공정한 가격형성에 기여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자유시장경제의 하나의 큰 명제이며 원칙이다. 그러나 대기업 자본의 소비시장 진출은 한계를 분명히 정하였어야 했다. 그것은 공정 경쟁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몰락과 함께 대기업의 독과점 시장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분배되어야 할 유통 마진을 독식하고 유통시장의 독점을 통하여 다수의 생산자를 압박하는 비정상적인 시장을 만들어 버렸다. 무분별한 대형마트의 시장독점, 편의점으로 대표되는 골목상권의 독점, 가전업계의 직영화, 주유소 충전소의 직영화 등 생활 전반의 소매 시장과 도매 유통을 장악하는 독과점의 형태를 이루게 하였다.
이는 중소기업의 몰락과 창의적인 기업 창업을 방해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훌륭한 재품을 만들어 생산하더라도 판매시장을 찾기가 힘들다. 유통구조를 대기업을 중심으로 단순화 한다는 것은 결국 고양이에게 생선을 주는 꼴이다. 유통구조의 단순화를 통하여 소비자에게 혜택을 준다는 명분은 유통구조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단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대자본의 진출은 엄격한 통제 속에 이루어져야 그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대도시를 점유한 백화점은 세계 유명 브랜드의 경우 30%이내의 판매수수료를 책정하지만 국내중소기업 제품은 50-60%에 해당하는 판매수수료를 책정한다. 결국 수수료란 것이 유통책임-매입에 대한 재고 책임-을 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매입금액을 대비하여 마진을 100% 이상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공기업의 판매유통에서도 나타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금의 얼마를 사회에 기부하느냐가 아니라 공정한 상거래를 위한 기업의 본질적인 사회적 책임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IMF이후 최대의 이익을 위한 기업의 모든 경제행위가 정당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세상은 나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으면 나를 돕는 사람도 반드시 있다. 이 여정을 쓰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한 조그만 여유가 기회를 다시 만드는 것 같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고 계획을 가져야 하는지 분명해진 것이었다. 돌파구는 주변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된다. 정보를 얻고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나 자신이 홀로 굳건히 서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