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멉추어 서다
https://youtu.be/VixFiMCUMl8?si=WeAIHvt1uJBfUxIn
상실의 시간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의 기억들은 잊혀진 감정의 그림자를 움켜잡고 있는 것이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아픈 기억으로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그동안 많은 상실의 시간을 잊으며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실의 순간들을 흩어지는 안개처럼 막연한 과거 속에 ‘그럴 수 있다!’는 끄덕임으로 던져 놓았다. 그럼에도 현실 속에 그러한 허상들은 다시 재현되는 것이었고 그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덩어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시 살아있는 육체의 형상에 주어지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온전히 그러한 감정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그러한 격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자연스럽게 순화되어 맑아지는 자신을 경험한다. 나는 이것을 감정의 승화라고 스스로 명명했다.
감정의 승화는 카타르시스를 뛰어넘는다. 카타르시스는 인간 누구나가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등이 해소되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비극 속 주인공의 끔찍한 운명을 목격한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이 유발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해소되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정의 승화는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감정의 해소를 넘어 인간의 감정을 통해 다가설 수 있는 지향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커다란 그리움을 알게 하였지만 아내의 죽음은 사무치는 상실감을 안겨준 것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상실감은 나의 육체에 기억되어 알 수 없는 묵직한 설움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터무니없는 눈물을 흘리게도 하였다. 그 순간 나는 그러한 나의 서러움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도 없는 무게였지만 만약 애써 그러한 감정을 잡으려고 하였다면 나는 정신적인 병적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나의 인생에서 이러한 슬픔의 크기를 알게 하는 순간순간을 감사함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힌 기독교적 감사의 덕목이 내게 이러한 깨달음의 기회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속에 마음의 평화와 인간의 맑음을 알게 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이를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며 살아왔었다. 그것은 나의 작은 욕심이나 화를 내는 사소한 것까지도 포함된 것이다. 사람마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생각보다 그러한 경향은 심하게 나타난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그러하고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그러하다. 심지어는 남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있어 상실의 시간이 처음에는 화를 내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내가 왜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하는 하소연 같은 것이었다. 내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고통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모든 삶에 주어지는 필연이란 사실을 아는 것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체가 삶의 겸손을 배우는 것들이었다.
치열했던 첫사랑의 상실감은 인간의 소망이 욕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삶은 이렇다!’라는 삶의 정의를 강요받아야 했다.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 역시 내가 피해갈 수 없는 극도의 설움을 안겨주는 것들이었지만 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의 필연을 삶의 지속과 함께 상실감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와의 이별은 참으로 가혹했다. 서울의 낯선 병실에서의 100일은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기도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믿음은 반드시 기적을 만든다고 생각한 날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나를 우롱하고 있었다. 사고가 있었던 다음날 기적적으로 수술에 성공하며 아내는 겨우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아내가 좀 더 안정된 후에 항공편으로 서울의 큰 병원에 옮기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고비를 다시 넘겨야 했다. 나는 사투를 벌이는 아내 곁을 내내 지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아내가 애써 웃음 짓던 밝은 미소와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던 아내의 삶의 의지를 지켜보며 나는 아내의 회복을 확신하고 있었다. 창문 밖의 변해가는 계절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겨울 어느 날 아내는 결국 삶의 끈을 놓고 말았다. 나와 함께한 삶의 대한 투쟁과 같았던 모든 의지를 내려놓았던 것이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말이다. 나는 이러한 니체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다. 니체는 이 문제가 소크라테스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시간이 지나도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영혼의 힘인 '이성'을 '육체'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육체적인 삶을 도외시하는 문제가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을 플라톤이 이데아 사상으로 계승하였고, 플라톤의 '이데아'를 그리스도교가 '신'의 개념으로 계승하며 이러한 신과 인간이라는 이원론의 문제로 고착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현실의 삶'보다 '천국에서의 삶‘을 더 강조하게 되어 현실의 삶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은 죽어야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의지를 말하려 하였다.
첫사랑의 사망을 선고받은 그 날도 나는 교회를 찾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하여 간절히 무엇을 소망하여도 '삶은 그것이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신에게 울부짖었던 그 날 나는 신을 용서하였다. 신에 대한 용서는 나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인간으로서의 의지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고 삶의 지속에 대한 책임의 자각이 된 것이다. 나는 신이다. 성경에서 말하듯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나는 하나님과 교감하는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의 에너지와 함께하고 동시에 스스로 존재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본능이며 동시에 인간의 의지이다. 그러나 수많은 다른 사람의 배신을 경험케 함으로서 그렇게 인간의 사랑은 도전받고 있다. 사랑은 믿음을 동반하고 그 크기만큼 배신감의 크기도 커져서 인간의 절망을 가져오는 이유가 된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속죄와 용서는 인간의 덕목이 되고 이를 통해 얻는 감정의 승화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실의 순간 그것을 헤어 나오는 것이 어려운 순간들도 있다. 그 대상이 분명하지 못한 경우다.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 스스로 갇혀 있다는 의식에 빠져 있을 때 인간은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내 스스로 지쳐 절망에 빠져든다. 자신의 신념이 좌절되거나 경제적인 궁핍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그 이유를 찾게 되어 좌절을 경험케 한다. 사실 인간에게 주어지는 궁핍함만큼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없다. 아마도 이는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고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육체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상실의 크기는 다른 것들과 견줄 수가 없게 된다.
인간은 살아가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거나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 들이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이를 일찌감치 포기하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하여 끝임 없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변명의 수준에 있으면 그래도 개선될 여지는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결국 남을 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인간은 다른 이의 이러한 작은 하나하나에도 스스로가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박탈감은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주어진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해서이다.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과거의 시간들을 거치며 미쳐 알지 못했던 작은 것들에 감사를 알게 하였다. 부부가 함께 늙어갈 수 있는 소소한 일상도 부러워하게 되었고 착한 아들의 특별날 것 없는 성장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아들의 일상에도 감사함을 느낀다. 행복하지 않다고 투정부리지 않을 수 있는 나의 모습에도 감사하고 오랜 시간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부유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잘 적응하여 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에도 감사함을 느낀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인간의 욕심을 버리려는 의지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상실의 시간. 인간에게 이러한 시간들은 결국 삶에 대한 겸손을 배우는 것들이다. 모든 것은 ‘그럴 수 있는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면 상실의 시간도 지나간다. 삶은 겸손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고 인간은 이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나는 부처가 신이 되었다는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재물이 되었다는 것도 알 것 같다. 그들은 인간이 신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미워해도 사랑하려 하고 분노해도 용서하려 하는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삶의 가치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가 동시에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오묘한 가치는 끝임 없는 보다 바름을 향한 노력만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은 인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고 맑은 영혼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감정은 승화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인간의 삶 속에 끝임 없이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