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니의 발바닥
기억은 연약하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라던데, 잊어가는 기억들을 떠올리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원하는 것만 기억하고 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그렇게 되면 잊어버린(혹은 잃어버린) 기억들을 다시 되찾고자 난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보 같으니까 무심코 버리고 아차, 할지도.
요새는 사랑하는 것들이 생기면 기록하려고 노력한다. 사람, 취미, 동물, 풍경 같은 것들. 핸드폰 메모장에 쓰기도 하고 노트에 직접 쓰기도 한다. 이건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어떠한 숙제처럼 의무감에 하는 것이다. 기억은 적어두지 않으면 금방 휘발된다. 애써서 복기하지 않으면 내 머릿속에서 날아간다. 날아간 기억은 어디로 가는 걸까. 잃어버린 기억들의 무덤이 있을까. 그 무덤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을 테니 아주 외로울 거다.
요새 바니는 내 얼굴에 자기의 앞발을 자주 가져다가 댄다. 내가 침대에 누워있으면 다가와서 발을 아주 천천히 내밀고, 그대로 내 볼에 얹는다. 날카로운 발톱은 꼭꼭 숨기고 조심스레 말이다. 슬그머니 볼에 닿는 바니의 발은 말랑하고 따뜻하다. 털은 부드럽고 간지럽다. 코끝에는 바니 발의 꼬순내가 맴돈다. 그럼 나는 순간 아주 몽글몽글하고 다정한 기분이 된다. 멀건 햇살이 내리쬐는 봄 같은, 혹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행복에는 이름이 참 많다. 바니가 알려준 것들 중 하나이다.
내 배 위에 누운 바니를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아득한 추억이 될까. 언젠가는 흐릿해질까, 하는 것.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그냥 이 순간에 멈춰서 하염없이 구질구질 해지고 싶다. 미래는 아무렴 괜찮으니 그냥 이 현실에 머무르고 싶다. 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는 것은 당연한 건데 그게 못내 야속하게 느껴지는 건 봄기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