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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9. 두 얼굴의 두 남자

(제7일 차 /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

by 소울메이트


9. 두 얼굴의 두 남자



♧ 오늘의 코스


오늘(9.30)은 순례 7일 차로 숙박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마을을 출발하여 ▷ 로그로뇨(Logrono)까지 27.6km를 8시간 동안 4만 3천 보를 걸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우중에도 행진을 계속하여 장거리를 기진맥진한 상태로 로그로뇨의 한 펜션에 투숙하였다. 숙박지인 로그로뇨(인구 13만 명)는 라 리오하 주의 주도(州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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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gronze.com/camino-frances


로스 아르코스를 숙소를 출발하면 축구장 대여섯 개를 훨씬 넘는 포도밭을 좌우 날개로 하여 그늘이 없는 평지길을 마냥 걸어야 했기 때문에 단조롭고 지루했다.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려서 비옷을 입고 출발해서 거추장스러웠지만 더운 햇빛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하늘에는 무지개, 땅에는 전설이 열리다


산솔(Sansol)을 지나자 날씨가 개더니 무지개가 떠서 하늘에 아름다운 아치를 만들었다. 월리엄 워즈워드의 시 “무지개”가 뇌리를 스쳐갔다.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은 뛰 누나 / 내 아직 어렸을 적에 그러하였거늘. 어른 된 지금도 마찬 가지어 늘 / 내 늙은 뒤에도 그러하리라-(이하 생략)"


순례길에 무지개가 떴다.

늙은 내 가슴에도 무지개가 뜨며 내 가슴이 뛰고 있다. 그 얼마만인가? 하늘에서 무지개를 본 지가? 70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좋았다. 반가웠다. 순례자들도 하늘에 대고 환호성을 지르며 무지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산솔(Sansol)에는 "순례자의 물의 기적"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부터 이 마을은 카미노(길)를 따라 있는 다른 많은 마을과 마찬가지로 순례자들을 환대한다는 소문이 났다.


어느 해인가 우물이 말라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순례자들이 물을 구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다. 한 순례자는 마른 우물 옆에 무릎을 꿇고 자신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우물에서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하며 귀중한 물을 마셨다. 이 우물은 "순례자의 우물"로 소문이 났고, 이 물을 마신 사람에게 힘과 치유를 제공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5km쯤 더 걸어가자 산길로 들어설 즈음에 털보 아저씨가 초라한 극장의 매표구 정도 크기의 미니 바에서 음료수와 과일을 팔았다. 보면 볼수록 구제불능이다 싶게 못생긴' 과일 들이라서 입맛이 당기지 않아 눈팅만 하고 지나쳤다.


배고픈 상태로 6km쯤 더 걸어 아담하고 아름다운 '비아나'에서 순례자 메뉴로 점심식사를 포식하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그림 같은 마을인 ‘토레스 델 리오’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묘 교회(Iglesia del Santo Sepulcro)로 유명하다.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연상시키는 팔각형 모양이 독특하다. 이 교회는 12세기에 신비로운 지식과 건축적 솜씨로 유명한 기사단이 주도하여 건설했다.


기사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환상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받았다. 그 환상은 그들에게 정확한 크기와 구조를 잉태하여 교회를 강력한 영적 등대로 만들게 했다. 하지만 교회 건축자들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고, 건축물이 완성되기 전에 구조물이 무너졌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에서 신의 가호를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밤, 신비한 순례자가 나타나 지시를 했고, 건축가는 그 지시를 따르자 더 이상 큰 문제없이 교회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들이 순례자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했을 때, 그는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그 순례자를 신이 보낸 천사라고 믿게 되었다.


♧ 체사레 보르자의 최후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있는 마을 '비아나'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과 관련되어 있다. ‘체사레 보르자(1475-1507)’가 그 주인공이며 이 마을에서 그가 죽음을 맞았던 곳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르네상스 시대의 권모술수에 능했던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한 편의 막장드라마였다.

그는 야망이나 군사적 위력을 가지고 엽색행각을 부린 막장에 가까운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서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우리네 홍길동은 서자라서 출세를 못해 삶이 괴로워했지만, 매사에 적극적인 체사레 보르자는 정반대로 권력을 누리며 살다 말년에는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영토인 '파플로나'의 주교로 일하다가 아버지가 교황이 된 1492년에는 발렌시아 대주교가 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 (Il Principe) 제7장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군주의 전형적인 모델로 꼽았다.

GOMCAM 20241015_1725530759.png (좌) 마키아벨리 (우)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는 자기 책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가 행동과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권력을 효과적으로 유지했다고 주장하였다. 보르자는 필요할 때마다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고 적들을 제거하는가 하면 동맹을 맺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때로는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마키아벨리는 운이나 악행으로 권력을 잡은 군주는 잔인함도 잘 사용하면 권력을 지킬 수 있다는 독재자의 군주상으로 '체사레 보르자'를 소개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권력을 이용해 필요할 때마다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배신을 통해서 적을 제거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는 당시 누구보다도 정치적 술수에 능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운이 다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의 전략이나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외부 요인들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체사레 보르자의 실패에서도 교훈을 얻으라고 충고했다. 군주가 성공하려면 체사레 보르자와 같은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예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507년, ‘체사레 보르자’는 '비아나'로 피난을 왔다. 그는 나바라의 후안 3세 국왕의 매제였는데 반군으로부터 그 지역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숙련된 군사 지도자로서 사명을 달성하려고 군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비아나 성벽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배신당해서 매복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갑옷이 벗겨진 채였고, 흘린 피는 굳은 상태였고, 눈은 뜬 채로 전장에 버려졌다. 후안 3세 왕은 그의 눈을 감겨주고 자기가 입고 있던 진홍빛 망토를 벗어 그의 유해를 덮어 주었다. 비아나의 마을 사람들은 사령관의 유해를 ‘산타 마리아 교회’로 옮겼다. 그의 악명 높은 명성으로 교회가 모호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별다른 의식 없이 매장되었다.


내가 만난 이 마을 사람들은 체사레 보르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을 스페인 발음이 나빠서 못 알아들었는지도 모른다.


♧ 산티아고의 두 얼굴


오늘의 목적지인 로고료노에는 4개의 성당이 있다. 그중에서 산티아고 엘 레알 성당(Iglesia de Santiago el Real)은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이 성당은 클라비호 전투(Battle of Clavijo)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9세기부터 짓기 시작했다.


클라비호 전투는 844년에 스페인 땅에서 기독교 왕국과 무어인 간의 역사적인 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의 배경은 당시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후, 기독교 왕국들이 반격을 시작하게 된 시점이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 라미로 1세는 무어인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실시했다.


전투 중 성 야고보가 전투에 나타나 아스투리아스 군을 도왔다는 전설이 있다. 클라비호 전투는 기독교 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는 기독교 왕국들에게 사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이 전투는 나중에 스페인에서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에 성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클라비호 전투는 이후 레콩키스타(재정복 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스페인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1513년 라미로 1세부터 가톨릭 왕(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시대에 본격적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6세기에 마무리하였다. 이 성당의 현관은 바로크 양식인데 벽감 안엔 거대한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전사 산티아고) 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산티아고가 무어인들과의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 밑단에는 조가비를 매단 순례자 복장을 한 산티아고의 조각상도 볼 수 있다.


가톨릭교도가 아닌 나에게는 이슬람에 대하여 용맹스러운 장군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사도인 산티아고의 상반된 이미지가 그림에 담겨 있음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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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인 로그로뇨는 중세 시대에 무어인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목숨과 도시를 파괴를 두려워하며 ‘산티아고 엘 레알 교회’에 모여 보호해 달라고 성 야고보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날 밤, 무어 군이 도시에 기습 공격을 준비하던 중 거위 무리가 교회 주변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GOMCAM 20241015_1328530941.png (좌) 산티아고 엘 레알 성당 정문(우) 산티아고 마타모로스(전사)


거위의 울음소리가 크게 지속됨에 따라 주민들은 재빨리 무장하고 방어군을 조직하여 침략자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성 야고보가 거위를 보내 공격에 대해 경고했다고 믿었고, 그들의 구원을 성인의 신성한 개입의 은혜로 돌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성 야고보와 교회에 계속 경의를 표하고 매년 행렬과 축제로 이 기적적인 사건을 기념했다. 산티아고 엘 레알 교회는 현재 로그로뇨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남아 있으며, 거위의 전설은 여전히 지역 주민과 순례자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다.


중세 교회 건물은 고딕 건축의 아름다움의 실체이며 성 야고보에게 바친 많은 예술 작품과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 산 마테오 축제


레스토랑에서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했다는 이 마을 주민이라는 할아버지가 이 지방 로그 로뇨의 ‘산마테오 축제(The San Mateo Festival)에 대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하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매년 9월 21일 리오하의 성인 마테오의 업적을 기리면서 포도 수확을 시작을 알리는 축제란다.


지난달에 개최된 축제는 예전보다 관광객이 적어서 이 지방의 경제 사정이 안 좋은 상태라고 한숨을 쉬었다. 축제 때 왔다면 더 좋았을 터인데 아쉽다고 말했지만 축제 기간에 왔다면 알베르게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토를 달아 나를 위로해 주었다. 축제에서는 포도 밟기, 와인 시음, 주악 퍼레이드, 음식 던지기(?),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는데 자기도 포도 밟기에 동원되는 마을의 선수였다고 자랑했다.


이 지방 포도를 원료로 만든 비누, 향수, 로션, 핸드크림 등등 상품도 다양하다고 기염을 토했다. 갈 길이 바쁜 나는 그의 장광설을 하염없이 듣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레스토랑을 떠나며 그에게 이별의 악수를 하면서 힘주어 말했다.


“나는 순례길에서 맛있는 스페인 와인을 엄청 마시고 다닌다. 내가 일생동안 마신 포도주의 양 보다 순례길 한 달 동안 마신 포도주 양이 더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 와인 마니아들에게 리오하의 포도주를 선전할 것을 당신에게 약속한다.”


♣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질문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차동엽 신부는 귀납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공기나 소리는 존재하지만 볼 수는 없다. 코끼리 몸에서 기어 다니는 개미는 코끼리의 실체를 모두 알지 못한다. 인간과 신의 관계도 이들과 비슷하다. 인간도 신의 존재를 느낄 뿐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인간이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흑백 TV로 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차동엽: 중앙일보 2011년 12월 17일에 발표한 답변 중 질문 1-24번에 대한 대답--이하 같음, 차동엽:199-213).


하지만 신의 존재나 부존재도 증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인간의 감각으로 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이 인간에게 나타나 자기 모습을 보여 줄 때만 가능하다고 본다(김안제: 752).


이어령 교수는 "예컨대, 부모-자식이나 연인 관계는 신뢰와 사랑이 기반이며, 증명을 요구하는 순간, 관계가 흔들리거나 파탄에 이를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연인 간의 사랑도 믿음으로 관계를 이어간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증명이 아닌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신뢰와 사랑은 모든 관계의 본질이며,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관계의 본질을 훼손하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증명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에 기초한 관계의 유지다"라고 설명했다(이어령: 21-24).


이에 백현기 장로는 신학자들은 하나님(하느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똑똑히 드러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고 말했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와 감각을 초월하는 분으로, 그분의 본질과 영광은 너무도 거룩하고 위대하여 죄 있는 인간이 보면 죽게 되므로(출애굽기 33장 20절), 죄 있는 인간이 볼 수 없도록 하였다(이사야 59장 2절),


둘째,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였고, 그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 될 뿐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계시(啓示)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전자는 자연(우주와 자연 세계의 질서, 법칙, 아름다움 등 - 시편 19편 1-4절)과 인간의 본성(인간의 도덕적 양심과 이성-로마서 1장 20절)이 있으며, 후자인 특별계시는 '예수'라고 설명한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온 하나님이다(요한복음 1장 14절). 따라서 이러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자고로 신학계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철학적, 신학적, 경험적 접근이 결합된 복잡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제는 개인의 신앙이나, 철학적 성찰, 그리고 종교적 경험에 뿌리가 내려왔다. 각 개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과제에 접근하고, 신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살아 있는 여신이 존재한다. 그 이름은 '쿠마리'라고 하는데 생리를 하지 않는 여자 중에서 좋은 요건을 갖춘 어린이가 선발되고, 생리가 나타나면 여신의 지위를 잃게 된다고 한다. 네팔의 네아르 족이 믿는 여신은 신도들의 접견을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은 신의 존재를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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