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일 차 / 나헤라 ~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
오늘(22.10.02) 순례 구간은 나헤라(Naiera)를 출발하여 ▷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까지 21km를 5시간 동안 3만 9천 보 가까이 걸었다. 그늘이 전혀 없었지만 사진 찍기 좋은 포도밭이 널려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헤라에서 아소프라까지 5.8km를 걷는 동안 아침식사를 먹을 레스토랑이 별로 없다고 해서 시내에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해결했다. 이러다가 영양실조로 순례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 외곽에 있는 햇빛 가림막이 없는 순례자용 벤치에서 준비해 간 바게트와 바나나 두 개로 아침 식사를 겨우 때웠다. 시루에나를 빠져나와 오르막길을 약간 올라가자 오하강을 만나면서 오늘의 목적지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했다.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를 세운 도밍고 성인은 1019년 이곳에서 멀지 않은 ‘빌로리아 데 리오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는 양치기로 성장하였다. 청년시절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애를 썼지만 배운 게 없어서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도밍고는 1040년경 오하강 둑에 있는 숲 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강을 건너려는 순례자들을 헌신적으로 돕게 된다.
순례자들이 깊은 산길을 걷다 보면 좁고 험한 길은 비로 유실되기도 했으며, 강물이 불어 나면 순례자들은 강을 건너면서 생명을 잃기도 했다. 이에 도밍고는 좁은 길을 넓히고 정비하여 순례자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강에는 다리를 세웠다.
순례자들을 겨냥하는 강도들로부터 피난을 하도록 숙소를 건축해서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는 1106년에는 마침내 카스티아 왕 알폰소 6세로부터 땅을 하사 받아 성당을 직기 시작해서 12세기말에는 그 자리에 카테드랄을 세웠다(홍사영, 2015) 90). 산토 도밍고 데라 칼사다 대성당(캐테드랄)은 12세기에 세워졌지만 그 후 여러 차례 증축과 보수를 거쳐서 천장을 덮은 궁륭과 도밍고 성인의 영묘, 주제단화를 완성하였다.
우리는 15세기의 기적에서 유래한 암탉과 수탉을 키우고 있다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14세기쯤 독일에서 온 젊은 순례자가 부모와 함께 순례를 왔다가 한 숙소에 머물렀다. 그런데 숙소 주인의 딸이 청년에게 반한 나머지, 청년에게 구애를 했지만 거절당했다. 화가 난 그녀는 자기 집의 은잔을 청년의 가방에 감추어 놓고 이를 도난 신고를 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의 본거지가 여기인 것 같다. 그 청년은 한사코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신간이 편해진다는 진리를 깨닫기에는 아직 철이 덜 들었던 모양이다. 청년의 가방에서 은잔이 발견되면서 그는 절도죄로 교수형이 처해졌다.
슬픔에 잠긴 청년의 부모는 아들의 죄를 속죄하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순례길을 걸었다. 순례길을 다 걷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처형된 나무로 된 교수대에 다시 가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아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아들의 다리 밑을 ‘산토도밍고’가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의 부모는 지방 재판관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고하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통사정했다.
통닭 요리로 식사를 하고 있던 재판관은 “당신의 아들이 살아있다면 여기 식탁의 통닭도 살아날 것이다.”라고 빈정거렸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내 손에 장을 지저라"라는 말이었다. 바로 그때 식탁에 있던 한 쌍의 구운 통닭이 접시에서 뛰쳐나와 큰 소리로 울었더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따로 없다. 이를 본 지방 재판관은 청년을 풀어주었다. 그는 재판을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밧줄을 목에 맨 채로 재판에 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한 처녀의 무고한 모함이 한 청년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초래할 위기를 맞게 만들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것은 권리일 수도 사랑을 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짝사랑은 죄가 아니지만 한 청년의 생명을 빼앗은 처녀는 죄로 처벌받아도 싼데 이 처녀가 어떻게 회개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지옥에서 천벌을 받았을 것 같다.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삐친 여자의 보복은 잔인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랑 때문에 애먼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생명을 끊게 하거나 단축시키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종교적으로는 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순례를 다녀온 부모의 신앙심에 하느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도밍고 성인의 자비심을 연계한 전설이다.
성당에서 도밍고 성인이 잠들어있는 무덤 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듬었고, 기적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탁자는 고딕양식이며, 소 성당은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15세기 중반 산토도밍고의 기적을 기리기 위해 대성당(캐테드랄) 안에 살아 있는 닭을 키울 수 있도록 닭장을 만들었다. 닭장 위쪽에는 교수대로 사용됐던 나무 조각이 걸려 있고 아래쪽에는 이 전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액자가 걸려 있다.
이런 전설 때문에 중세에 순례자들은 여행 중에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성당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밤에는 울지 않는 닭의 생리를 잘 아는 나이기에 내일 새벽 미사 때 다시 오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좌)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 성당 주제단 (우) 닭의 기적 전설의 그림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느긋하게 걸으라는 충고는 우리 배달민족에게는 무례한 주문이 아닐 수 없다. 지난 40년간 우리 국민들의 머리에 박힌 구호는 “빨리빨리” 였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가시오”라는 성경 말씀이 있지만 신자들의 순례길에서는 평화가 사라지고, 숙소를 차지하려는 경쟁만 넘쳐나고 있다. 값싼 숙소를 차지하려는 순례자들의 경쟁은 너무나 치열하다. 남을 위해 양보할 생각은 눈곱 만치도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사람은 자유의지 대로 살아가는 존재이고, 세상은 적자생존이라고 생각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의 숙소 시스템에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다. 목적지에 한 발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가성비 좋은 공립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구하는 것은 신이 자기에게 부여한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한 결과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괴테는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라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순례자들은 이층 침대보다는 일층 침대를 차지하려는 욕심까지도 채우려 한다. 남이 편안하게 지내도록 양보할 생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순례길은 배려와 감사가 깃든 사랑을 실천하는 도장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순례자들은 선착순 경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숙박료가 싼 공립 알베르게보다는 안락한 숙소가 필요했다. 혼자서 느긋하게 걸으면서 사색할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방을 구하지 못하면 노숙을 하거나 널빤지나 매트리스 바닥에서 하룻밤을 자야 하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플래시를 켜고 별을 보며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서 걸어야 값싼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 새벽에 지나온 마을의 유적이나 전설이나 기적은 눈팅 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러저러한 절박감이 나와 아내를 무한대로 서둘게 만들었다.
걷기 대회 참가해서 선착순으로 침대를 배정받으려고 일찍 도착한다 해도 2시까지는 기다려야 체크인을 할 수 있다. 사람 대신 배낭들이 태양의 뜨거운 횡포를 견디며 줄을 길게 서게 된다. 새치기할까 봐 멀리 가지도 못하고 가까운 나무 그늘 밑에서 배낭을 지켜보다가 졸기도 한다.
자기보다 앞에 도착한 누군가가 차례를 포기하고 떠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이런 게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인가? 묻고 싶다. 시계를 수십 번 들여다보며 알베르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마음에서 느긋함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어렵사리 도미터리 침대를 배정받아도 크게 즐겁지 않다. 좁고 깨끗하지 못한 샤워실이나 지저분한 화장실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 순례자들의 땀 냄새, 신발의 악취가 장난이 아니다. 침실에서는 끙끙대는 신음 소리, 코 고는 소리, 잠꼬대하는 소리, 꿈속에서 전쟁에서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자욱하다.
산티아고 순례자가 800Km를 33일간 완주하려면 33개의 각기 다른 숙소를 노크해야 한다. 순례길에서 숙소의 선택은 순례길을 완주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알게 된다.
현실이 그러한데도 산티아고 순례 전문가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걸으라”라고 주문한다. 뜬금없는 소리다. 우리 같은 시니어들은 정말 느긋하게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값이 상대적으로 싼 공립 알베르게는 사전예약이 안 되는 시스템 때문에 순례자들은 침대를 차지하려고 아침부터 걷기 경주를 시작한다.
'공립 알베르게'는 14시부터 '선착순'으로 침대를 배정하고 있다. 이러한 숙소배정방식은 50년 전 군대 시절에 지겹게 경험했던 '선착순'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군대의 '얼차려'를 산티아고 공립 알베르게들이 수입해 쓰고 있다. 걷는 역량이나 체력이 약한 노년들에게 '공립 알베르게'의 침대는 그림의 떡이다.
나이 많은 은퇴자들이 '공립 알베르게'에 투숙하려면 선착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이에 필요한 체력과 도전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순례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선착순 레이스'에 참가하여 '공립 알베르게'의 베드를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선착순 방식은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자연스럽게 침대 쟁탈전에 참여하게 만든다. 순례자들의 침대 쟁탈전의 모습은 전쟁터의 병사들을 방불케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쓴 '마이클 샌델' 교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이런 게 공정한 경쟁이냐고? 순례의 숭고한 목적을 잊은 채 매일 제한된 수의 '공립 알베르게'의 침대를 차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공립 알베르게에는 2인실과 3인실도 있지만 대개 도미터리 룸 형태로 구성되며, 한 개 룸에 2층 벙커 침대를 20~30개를 배치하여 40명~60명까지 수용하는 유스호스텔 수준이다. 하루 침대 값은 6€~10€ 정도로 우리나라 여인숙 수준으로 싼 가격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성당과 수도원과 수녀원 등 종교 유적을 숙소로 리모델링하여 순례자를 자게 하는 공립 알베르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알베르게는 얼핏 보면 병원의 병실 같기도 하고, 누에를 키우는 잠실(蠶室) 같기도 하다. 나는 매일 한 마리 누에가 되고 싶어서 안달한다. 잠실 시민아파트처럼 소박하기 짝이 없다. 처음 며칠 동안은 숨이 막히고 답답하지만 며칠 지나면 적응된다. 신의 가호로 내려주신 적응력 덕분이리라. 순례자들은 1,2층 침대에서 자기 침낭 속에서 하룻밤을 누에고치처럼 잠을 자게 된다.
나는 은퇴한 순례자로서 닭장 같이 불편한 숙소에서 “개고생을 왜 사서 해야 하는가?”라고 자문, 자조하면서, 순례길 완주하려던 마음이 자꾸만 흔들리기도 한다.
도미터리 형태의 구조를 가진 사립 알베르게는 공립보다 시설이 현대적이며 깨끗하고 서비스가 좋다. 그러나 깨끗하고 편리하기 때문에 일찍 마감되어 버린다. 사립 알베르게는 예약을 받고 배낭배달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서 은퇴자나 노약자들이 많이 이용한다.
순례길을 느긋하게 걷고 싶어서 우리 부부는 선착순 베드 레이스를 하지 않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남들보다 많이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시간부자인 우리는 공립 알베르게는 포기하고, 예약이 되는 사립 알베르게로, 그곳에도 잘 수 있는 침대가 없으면 호스텔을, 호스텔 예약이 마감되면 펜션을, 펜션 방이 없으면 호텔이나 아파트를 예약하기로 했다. 그렇게 숙소를 필터링하다 보면 숙박비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지만 대신에 느긋함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 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지는데 '진화론'도 인간이 제일 뒤에 만들어진다. 태초의 빅뱅은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물질과 에너지가 나누어지는 순간이다. 이후 모든 진화 과정이 그 자체로 신의 섭리요 기획이라면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 혼돈에서 질서로, 그것이 바로 창조이고 진화이다.
우주에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수학적·물리적 질서가 있다. 그것을 기획하고 만든 창조주가 없다면 질서가 있겠는가? 우주 만물이 존재하는데 그 만물에 속성과 질서가 없다면 그것은 우연의 결과요 창조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물에 속성과 질서가 있다면 어떤 신이든 그것은 그에 의해 기획된 결과라고 생각한다(이어령:26-27).
인간과 생물의 진화와 신의 창조를 둘러싼 논의는 오래전부터 전개되어 과학적 관점에서는 ‘진화론’을, 종교적 관점에서는 ‘창조론’으로 주장되고 있다. 총체적으로 보면 과학은 '어떻게(how)'에 초점을 맞추고, 종교는 '왜(why)'에 초점을 맞추는 정도의 차이가 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진화론'은 찰스 다윈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제안한 이론으로, 자연선택을 통해 생물 종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하고 다양해진다고 설명했다. 자연선택은 환경에 적응한 개체들이 생존하고 번식하여 유전적 특성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과정이라면서 화석 기록, 유전학, 분자 생물학 등의 다양한 증거들이 진화론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창조론'은 신이 우주와 생명을 직접 창조했다고 믿는다. 많은 종교 전통에서는 신이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나온 대로 창세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 창조론자들은 주로 성경이나 다른 종교 경전에 근거하여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과학적 진화론과 신앙을 조화시킨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주장한다. 즉, 신이 진화 과정을 통해 생물을 창조하고 지시했다고 주장한다. 프란시스 콜린스 등이 대표되는 이 관점은 신이 '진화의 법칙'을 설계하여 이를 통해 생명을 창조했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으로 탄생한 것이지 원숭이나 다른 피조물에서 진화된 존재라는 증거는 없다. 성경은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창조했다고 보고 있다. 각 피조물의 종이 그 종에서 진화, 발전할 수는 있어도 다른 종으로 자연적으로 진화하여 발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론은 비과학적이고 진화론은 과학적이라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오늘날 DNA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썸띵 그레잇(Something Great)’이라는 표현을 쓸 뿐이다. 초기 진화론자들은 진화의 원리가 먹고 먹히는 포식(捕食) 관계에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진화론 자체가 더 진화하더니, 그 원리가 포식 관계가 아닌 미셸 세르(Michel Serre, 1930~2019)가 말한 것 같은 기생(Le parasite) 관계, 숙주와 기생물의 관계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최근 학계에서 수없이 부정되고 거절되어 왔던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5~2011)'는 포식도 기생도 아닌 ‘심바이오시스 (Symbiosis)’, 즉, 공생 이론이 인정을 받게 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토콘드리아 이론'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함께 나누고 서로 도와주면서 산다는 ‘코이노니아(Koinonia)’와 같은 맥락이다(이어령: 26-27).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심바이오시스, 공생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도우라고 하는 말씀은 진화의 원리는 포식과 기생이 아닌 공생으로, 기독교적 가치관과 다를 게 없다.--
차동엽 신부는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따라서 진화론은 창조론을 전제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는 기술은 단지 '은유적 표현'이며 오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은 것'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한다(차동엽:질문 3 대한 대답).
이와 같은 맥락에서 김안제 교수도 우주만물은 신에 의해 창조된 이후 계속 진화돼 왔다는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Genesis)에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창조된 시기가 기원전 4004년이라 한 것은 당시의 천체 운행시간이 오늘날과 달랐기 때문에 나온 시각의 차이라고 보고 있다(김안제: 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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