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대중의 이미지와 우릴 위협하는 존재들

by 부뚜막위고양이

대중이란 뭔 뜻일까? 국어사전엔 수많은 사람의 무리, 엘리트와 반대되는 개념 정도가 될 거 같다. 우린 항상 많은 사람을 마주하며 살아가는데 그중 우리가 생각되는 대중이란 어떤 모습인가. 떠올려보면 당신이 비 장애인일 경우 대개 비 장애인의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모습이 그러한가? 물론 그러할 수 있지만 당신이 상상한 대중과 실제 대중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한쪽 팔, 다리가 없어도, 정신적으로 우리와 달라도, 앞이 보이지 않아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움직이지 못해도 그 사람들 또한 우리와 같은 대중이다. 나 또한 그랬다. 대중이라는 게, 대중적인 글을 쓴다는 게, 우울하지 않은 글과 희망, 행복한 일상을 써야 하고 누군가에게 핍박과 억압을 받은 대중, 차별과 뭇매를 맞는 대중은 대중의 취급을 못 받는 것을 외면하고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 행복만 존재하듯 내 일상의 행복만 쓴다면 그건 소설에 불과하다. 내 인생엔 결코 행복하지만 않으니까 불행도 내 인생인 만큼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불행한 일에 상처 받아 힘들었을 사람들에게 위로와 축복을 전해주는 것이야 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 또한 과거에 정말 침울한 일상을 보냈다. 가정폭력과 폭언과 폭행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가정에 지내며 누군가의 눈치와 기분을 살피는 삶이란 하루 종일 달걀을 들고 사는 것과 같다. 연약한 껍질 안에 들어있는 흰자와 노른자가 언제 땅바닥에 널브러질지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인생에서 슬픈 영화나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내 인생이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내 인생을 보기 싫었다. 행복하고 싶었고 다른 가정을 부러워하며 지냈다. 나만 불행하고 우울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가볍고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 싫어 책을 읽었다. 감정 기복이 생기지 않고 항상 차분하게, 일정한 감정을 가지고 살기 위해 책을 읽었다. 신기하게 가정폭력이란 학대는 우리 사회에서 꽤나 흔한 일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폭력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으며 괴로운 목소리를 용기 내 결코 혼자라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렸다. 덕분에 난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서 끙끙 앓을 필요가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책으로 충분히 위로를 받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내 과거를 통해 위로를 해주기 위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흔히 겪는 아픔과 슬픔, 우울, 상처가 없다면 내 글을 볼 필요 없다. 지금의 삶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의 아픔과 슬픔, 우울, 상처를 머금은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려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사람에겐 굳이 멋진 말과 긍정적인 말보단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알려줘도 충분하다.

각종 차별은 단지 정신적,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지 않아도 생긴다. 가령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빌라 거지, 흙수저 등 자신의 부모의 자산과 집을 관련해서 차별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차별적인 발언과 단어는 그의 부모님의 가치관으로부터 나온다. 자신은 아파트에서 냄새나지 않고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그걸 이용해서 자신과 급을 나누고 못 사는 친구에게 차별을 하는 사회를 너무나도 일찍 배운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자산 이외에도 성별도 상당히 차별적이다.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 여성들은 자신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딸 같단 이유로 서슴없이 함부로 만지는 직장상사, 배는 튀어나와서 남의 몸매 관리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말하는 선배, 돈은 없고 여자는 만나고 싶은 연하들, 참 듣기만 해도 피곤이 밀려온다.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등장 해 직장 내 성희롱, 성폭행이 줄어들고 과감히 대응할 수 있는 사회가 돼가고 있다. 하지만 여김 없이 유명인사부터 이웃사촌의 성폭행의 역사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미투로 인해 유명 정치권 인사들과 연예인들의 몰락을 꽤나 많이 봐왔다. 더 나아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미투가 일어나고 있다. 굳이 유명인사가 아니어도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사회안전망이 촘촘하게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의식이 높아지므로 고발 정신이 투철하며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돕는 등 우리 사회에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일상에 녹아있는 차별들은 정말 섬세하게 느끼지 못하면 차별에 말이 잡아 먹힌다. 말이 잡아 먹히면 말이 날 잡아먹기에 차별과 말이 우릴 잡아먹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별을 차별하는 말과 나이에 따라 지칭하는 단어들이 신조어처럼 미디어 여기저기서 사용한다. 신조어란 단어 뒤에 차별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게 사용한다. 무분별한 사용으로 그 단어의 뜻이 특정 누군가를 차별한다는 생각과 다르게 습관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들, 그런 말들을 조심해야 된다. 그 단어가 지칭하는 사람들의 부정적 이미지가 굳혀져 결국은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항상 주변을 용인해야 된다. 세상엔 갈등으로 생기는 일로 시민들의 피고름을 빨아먹는 기생충이 있다. 그런 기생충들은 갈등을 일으켜야 살 수 있다. 그래야 기생충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되는 이웃들과 싸워 피고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우리는 기생충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시간이 온다. 겉은 기름이 흐르고 반질반질한 피부를 갖고 있지만 속 내는 마른걸레와 같다. 속은 썩어 악취가 나고 물기를 짜낸 마른걸레처럼 뒤틀려 있다. 하지만 기생충 또한 우리의 이웃이다. 용인하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기생충과 같은 차별을 하게 된다. 그럼 단지 역할만 바뀌었을 뿐 기생충은 그대로 우리 사회에 남아 존재할 것이다. 기생충의 생명력은 상당히 질기다.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 마음속에 식량을 확보하고 자신의 거처를 만들어 거기에 알을 낳는다. 그럼 조금씩 조금씩 마음속을 파고들어 말과 행동을 기생충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말과 행동이 전염병처럼 확산되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똑같이 들어가 자신의 거처를 만든다. 이처럼 쉽고 안락한 방법으로 사람과 사회를 파괴한다.

기생충을 안아주자는 말을 오해할 수 있어 말하지만, 기생충이 우리의 삶을 파괴해온 일을 단순히 책임을 묵인하고 우리의 사회에서 같이 살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충분히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기생충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차별과 학대를 멈추자는 얘기다. 물론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에는 우리는 용서를 해줘야 한다. 더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사회는 인내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보단 인내가 주는 번뇌와 권태가 결국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면 결국은 질투나 연민에 사로잡혀 이웃을 이웃으로 볼 수 없다. 집착과 편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웃은 사랑으로 표현하는 관계가 아닌 용인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내 시간과 능력을 기껏 이웃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