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항상 지루하거나 내 앞에 흰색 종이가 있고 내 손엔 펜이 쥐어져 있다면 망설임 없이 항상 정육면체를 그렸다. 감으로 슥슥 그리면 당연히 원근법과 모든 법칙을 무시한 하나의 도형을 그려냈다. 그러면 다시 그 위에 수정을 한다. 원근법에 맞게 뒤에 있는 부분은 더 작고 가까이 있는 부분은 크게 수정을 해 보면 그래도 역시 부족하다. 그래서 다른 여백에 다시 그려본다. 역시 모자라다. 항상 모자란 정육면체를 그린다. 쓸데없이 명암도 줘 보지만 영락없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도형이 탄생한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생기게 된 버릇이다. 학창 시절 수업시간이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상상 속에서 정육면체를 그리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정육면체를 그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지루한 일상을 좀 더 평온하고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마치 하나의 수련처럼.
내 상상 속에 있는 정육면체와 내가 실제로 그린 정육면체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내 상상 속 정육면체는 매끈하고 부드러우며 가볍고 깔쌈?한 정육면체이지만 현실은 정육면체라고 하기엔 머쓱하고 누군가에게 내놓긴 어려울법한 정육면체다.
내 상상 속처럼 세상이 돌아가게 된다면 그땐 정말 정육면체를 제대로 그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