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용도(?)에 맞게 인테리어하기
출판사와의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 속에 계약을 체결했다면 이제 책의 디자인을 정할 차례다. 기획출판이라면 출판사에서 책의 방향성부터 시작해서 판형, 표지, 내지까지 모두 결정해 주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작가의 뜻이 그만큼 덜 반영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독립출판의 경우에는 작가가 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출판사는 모든 재료를 갖고 있는 일종의 인테리어 회사지만, 작가가 판단하기 전에는 도배를 할 수도, 마루를 깔 수도 없다. 오직 작가의 생각을 그대로 구현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다.
표지와 내지 디자인은 집의 외관에 해당하므로 (그리고 책의 판매량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인테리어에 해당하는 판형, 내지, 레이아웃에 대해 알아보자.
판형이란 책의 사이즈를 의미한다. 판형은 책이 어떤 분야에 해당하는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단순히 디자인적 요소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용성을 따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문학 작품 중 소설이나 에세이 등은 국판, 신국판 사이즈를 많이 활용하며, 시는 글자 수와 페이지 수가 적기 때문에 더 작은 판형을 사용한다.
반면에 수험서와 같이 풀이 공간이 필요하거나, 내용물을 크게 보여줄 필요가 있는 사진집 같은 경우에는 국판(148*210mm, A5 사이즈), 신국판(152*225mm)에 비해 더 큰 판형을 활용하는 게 좋다. 내 책 <PSAT 원래 이렇게 푸는 거야>의 경우 수험서에 해당하지만 풀이 공간까지 줄 필요는 없었고, 수험생들이 한 손에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고민 끝에 국판보다 조금 큰 신국판 사이즈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기출문제는 본래 A3 용지에 출력되는 걸 고려해 만들어진 만큼 이를 신국판 사이즈에 줄여서 담는 것이 조금 벅찼지만,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작은 글자도 잘 읽겠거니 싶었다. 게다가 신국판이나 국판으로 제작하는 비용이 다른 판형에 비해 저렴했다. (일종의 기본옵션에 해당하기 때문에 추가금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지란 표지를 제외한 책의 속지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내지 디자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내지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는지, 내 경험을 이야기하려 한다.
내지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당연하게도 이름을 꿰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내 책에 적합한 종이가 어떤 특성을 지녀야 하는지만 생각하면 된다. 나는 <PSAT 원래 이렇게 푸는 거야>의 내지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길 원했다.
1. 무게가 가벼울 것
2. 형광펜 등 필기자국이 뒷장에 배지 않을 정도의 두께일 것
3. 필기감이 좋고 잉크가 번지지 않을 것
4. 아이보리색(미색)으로 눈이 편안할 것
첫째로 이 책은 수험서고, 평소 많은 책을 들고 다녀야 하는 고시생들을 고려할 때 무게가 가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항상 가방이 무거웠다. 학원 교재로도 이미 어깨가 무거울 텐데, 내 책마저 부담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둘째로, 수차례 회독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 책임을 고려할 때 회독 수를 늘리며 형광펜을 치거나 필기할 일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이때 형광펜 자국이 뒷 페이지에서 보여서는 곤란했다. 가독성이 떨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필기감이 좋기를 바랐다. 내 책은 수험서 중 가장 작은 판형에 속하지만, 그래도 내부 여백을 두어 수험생들이 필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공간을 마련했다. 경험상 필기할 여백을 거의 내주지 않는 수험서는 점차 손에서 멀어졌다. 또한 기껏 필기했는데 번지면 슬프기 때문에, 번지지 않는 종이를 원했다.
마지막으로 눈이 편하길 바랐다. 미색(아이보리빛) 종이를 찾고자 노력했다. 백색 종이의 경우 쨍할 정도로 하얗기 때문에 눈이 쉽게 피로해져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사실 내 머릿속에 있었던 종이는 미국 책(소프트커버)에 많이 쓰이는 '갱지'였다. 그러나 정보를 찾아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갱지는 만화책에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사용되지 않고, 종이도 두꺼운 편이라 제본하면 책이 두꺼워질 수 있다고 했다. 대신 내지로 흔히 활용되는 종이들은 따로 있었다. 모조지, 스노우지, 뉴플러스지, 마카롱지 등.. 같은 종이여도 두께는 80g, 100g, 120g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나는 출판사와 상의한 끝에, 두께를 얇게 해도 비침이 적은 '마카롱지 80g'을 택했다. 필기감도 나쁘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레이아웃이란 '책이나 신문, 잡지 따위에서 글이나 그림 따위를 효과적으로 정리하고 배치하는 일'이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내 책에는 일러스트, 기출문제, 그리고 텍스트가 섞여 있었는데 가장 먼저 정해야 하는 부분은 한 페이지에 몇 줄을 넣을지(줄간격)였다. 빽빽하게 넣으면 26줄이고, 넉넉하게 넣으면 20~22줄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 전자는 정보가 많은 글에 적합하고 후자는 에세이나 소설 등, 조금 여유 있게 읽도록 만드는 책에 적합하다고 한다.
줄간격을 좁혀 한 페이지에 많은 내용을 넣으면 책의 페이지 수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20줄과 26줄을 비교했을 때 대략 30%의 분량차이가 발생하는데, 페이지 수가 유의미하게 줄어들고 이에 따라 전체 제작비도 절감할 수 있다.
출판사를 통해 22줄~26줄 샘플을 받아 비교한 뒤, 26줄을 넣기로 결정했다. 내 책은 수험서라 넉넉하게 줄간격을 뽑아낼 필요가 없기도 하거니와, 페이지 수가 늘어나는 건 나와 독자 누구에게도 좋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줄간격이 전부는 아니었다. 좌우상하 여백은 얼마나 줄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는데, 당초 생각했던 바와 달리 판형을 줄이면서 여백을 넣을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여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지금의 레이아웃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판형, 내지, 레이아웃을 정하면 대략적인 책의 인테리어가 끝난다. 인테리어의 방향을 정했으니 완성된 원고(교정이 끝난 원고)를 얹기만 하면 된다. (참고로 가전/가구의 역할을 할 일러스트나 사진의 위치는 본문 교정이 끝난 후 마지막에 결정하면 된다) 다음 글에서는 표지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요즘 트렌드는 어떤지 다루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