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할때하자 Jul 08. 2022

휴식에도 좋은 휴식과 나쁜 휴식이 있다

고시생에게도 프리시즌이 있다. 잘 쉬는 것도 재주다.

  행정고시 2차 시험이 지난주 목요일에 끝났다. 사무관 동기 몇몇이 시험감독관으로 발탁되어 시험장에 다녀왔다는 소식도 들으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고시 공부를 끝낸 지 만 5년이 지났지만 매년 무더위가 찾아올 때쯤이면 해묵은 버릇처럼 고시생 시절을 돌이켜보게 된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고시가 있다. 언론고시, 임용고시 등 여러 종류의 시험에 '고시(考試)'라는 표현이 붙는다. 나도 한참 몰랐던 사실인데,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법고시에 붙는 '고시(高試)'는 여타 시험에 붙는 고시(考試)와 한자가 다르다. 고시(高試)는 고등고시(高等考試)의 준말로(행정고시/외무고시가 각기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외교관 후보자 채용시험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려운 시험/과제를 두고 '고시 같다'고 빗대어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쉬운 시험이 어디 있겠냐 마는, 고시는 정말 인권유린(?)을 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생각해보니 인권유린이 맞는 것 같다)로 가혹한 시험이다. (물론 주어지는 막중한 역할과 책임에 비하면 쉬운 시험이다. 그만큼 주어지는 역할이 무겁다) 말 그대로 '고시'를 보느라 숨차게 뛴 여러분을 위해 오늘은 '휴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얼마 전 프리미어리그(영국 프로축구 1부 리그) 시즌을 마치고 프리시즌(preseason :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기에 전에 펼치는 일종의 연습 경기 기간. 전지훈련이나 친선 경기 따위의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에 들어간 손흥민 선수가 한강에서 포착(?) 됐다. 최근 서울이 한증막처럼 푹푹 찌고 있음을 생각하면 손흥민 선수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더위를 뚫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손흥민 선수

    

  종목을 불문하고 모든 프로스포츠 종목은 시즌과 비시즌으로 구분된다. 시즌에는 주기적으로 리그 경기가 진행되고 다들 개인의 성과와 팀의 성과를 내기 위해 쉴 틈 없이 노력한다. 리그가 종료되면 부상에서 회복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거나, 훈련을 통해 기량을 끌어올려 다음 시즌을 준비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프리시즌이라 칭한다.

  프리시즌 얘기를 갑자기 꺼낸 이유는 매년 7월이 (EPL 선수뿐 아니라) 행정고시생의 프리시즌이기 때문이다. 행시생의 새해맞이는 7월에 이루어진다. 2차 시험이 끝났을 때 비로소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푹 쉬고 있을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하고 있을지, 아니면 벌써 기본서를 펼치고 다시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지.


  

1.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하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당신에게도)


  2차 시험은 힘들다. 제대로 공부했다면 (중간중간 놀았어도)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것이 분명하다. 제 아무리 좋은 핸드폰이어도 제때 충전하지 않으면 벽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아마 갤럭시 S50이 나와도 충전은 해야 할걸?)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똑똑하고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망가진다. 특히 꽤 오랜 시간 동안 놀고 싶고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지냈기 때문에 지금 이를 건강하게 풀어내지 못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난 아니야, 내 정신력은 약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오산이다. 한없이 쏟아내기만 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쏟아냈다면 반드시 채워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최신 핸드폰들의 배터리 용량이 늘어나면서 충전기 성능도 날로 향상되고 있다. 초고속 충전기를 사용하다가 간혹 느린 구형 충전기를 사용하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30분이면 충전될 것을 2시간 동안 충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휴식도 마찬가지다. 휴식에도 '좋은 휴식'과 '나쁜 휴식'이 있다.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야 한다. 벌써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러갔지만, 아직 쉴 시간은 조금 더 있다. 학원가에서는 '쉬지 말고 바로 다시 공부해라. 2차 시험 오답정리를 해라' 등의 숨 막히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항상 다그치기만 했던 강사의 관성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초고속 충전기처럼 우리의 숨통을 트여줄 강력하고 확실한 휴식이 필요하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

  

2. 좋은 휴식과 나쁜 휴식


  대부분 수험생들은 그로기 상태에 빠질 만큼 힘든 이 시험을 마치고 나면, 아무 계획 없이 집에 누워 먹고 싶던 음식을 잔뜩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거나 그간 못 만났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 약속을 잡는다. 물론 이런 휴식도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문제는 이것이 그다지 '좋은 휴식'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내 몸과 마음은 그간 심하게 고생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고생이 뚜렷할수록 보상(휴식)도 뚜렷해야 한다. 공부하느라 고생한 나 자신에게 확실한 휴식을 선물하지 않는 것은 몇 달간 매우 심하게 직원을 과로시킨 뒤 제대로 된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회사의 행태와 같다.

  기왕 회사 이야기를 꺼냈으니 더 해보자. 회사에서도 직원마다 휴식을 취하는 방식이 제각각인데, 5일의 연차를 0.5일치씩 나눠서 일 년 중 10일을 틈틈이 쉬는(오전만 근무하고 오후에 퇴근한다든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휴가를 아껴 5일간 여름휴가를 다녀오는 사람도 있다. 현실에서는 전자와 후자의 방식을 섞어 연차를 사용하지만, 둘 중 일에 지쳤을 때 나를 더 위로하고 힘내게 하는 '좋은 휴식'은 5일간 몰아쉬는 휴가다. 왜냐하면 여름휴가는 내 몸과 마음에 확실하게 '쉬었다'고 각인되기 때문이며 그만큼 강력한 보상이 될 것을 알기에 계획을 세우는 단계부터 들뜨는 것이다.

  반면 계획 없는 휴식, 소위 '나쁜 휴식'은 우리 기억에 남지 않고 잊힌다. 잊혀진 휴식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공부하다가 지치거나 슬럼프에 빠질 때 우리를 다시 힘내게 하는 것은 며칠이라도 제대로 쉬었던 기억이다. 나도 여전히 유예생 시절 다녀왔던 60일간의 유럽여행을 추억하며 회사에서의 고된 시간을 버틴다.

  계획 없는 '나쁜 휴식'의 문제는 또 있다. 계획 없이 쉬다 보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도 어렵다. 수험생에게 휴식이란 다시 뛰기 위한 준비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점에 그만 쉴 줄도 알아야 한다. 만일 쉬는 둥 마는 둥 하는 휴식을 취하면 내 몸이 확실히 '쉬었다'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재개하기가 어렵다. 아직 충분히 쉬지 못했다는 억울함이 드는 데다, 하루하루 나태(?)하고 잉여롭게 보내온 나날들이 생활 습관이 되어버리기까지 해서 결과적으로 공부습관을 되찾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미 몇 년간 고시공부를 해본 수험생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지금 이 시기에 계획 없이 놀다 보면 7월은 금세 지나가고 8월이 되고, 어느새 9월이 되어 2학기가 시작된다. 결국 두 달 가까이 공부하지 않고 쉬었음에도 '제대로' 쉬지 못해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채로 다음 시즌에 돌입하게 되는 참사(?)가 발생한다.

  반면 '좋은 휴식'은 무엇일까. 좋은 휴식이란 계획을 세워 집중적으로 쉼으로써 내게 강렬한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며 동시에 시작과 끝이 확실한 휴식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것은 여행이다. 여행은 그 자체로도 삶에 큰 활력소가 될 뿐 아니라 그 어떤 휴식보다도 기억에 남으며,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 여행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콘서트를 다녀온다거나, 새로 개봉한 영화를 아주 좋은 영화관에서 보고 온다든가, 뮤지컬/전시회 등 그간 즐기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집중적으로 즐기는 것도 좋다. 그간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보는 것도 집중적으로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지만 만나야지'로 기간을 정해둘 수 있다면 좋은 휴식이 된다.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도 먹고, 못 마셨던 술도 마시고 나 자신을 위해 뭐든 보상을 해주자. 뭐든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나 그땐 제대로 쉬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쉬면 된다. 연애 상대가 있다면 조금 색다른 데이트를 해보는 등 서로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3. 프리시즌과 시즌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수십억 수백억의 몸값을 자랑하는 프로선수들도 프리시즌을 현명하게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휴가기간에 찐 살을 빼지 못하고 뚱뚱한 몸으로 돌아와 다음 시즌 전부를 망치고 커리어에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는 경우도 있다.


이대호 선수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마음 때문인지) 체중을 대폭 감량하고 돌아와 MVP급 활약을 보이고 있다. (은퇴하지 마세요)


  앞서 '시작과 끝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을 좋은 휴식의 조건으로 언급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쉬는 것은 좋지만 너무 오래 쉬어서는 곤란하다. 올해 아무리 2차 시험을 잘 봤다고 할지라도 합격자 발표일까지 책을 손에서 놓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확실하게 쉬되 언제까지 쉴 것인지를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MBTI상 성격이 파워 P라서 여행이나 문화생활 등 '좋은 휴식'을 위한 계획은 도저히 세울 수 없고 방에서 영화/드라마나 보면서 뒹굴거리고 싶다고 할지라도, 언제까지 휴식을 취할 것인지만은 반드시 계획해두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권하는 건 앞으로 딱 보름만 더 쉬는 것이다. 7월 25일부터 남은 7월 간은 기본서를 가볍게 읽으며 앞으로의 1년을 위해 예열하고 8월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달리면 좋겠다.

 

4. 저는 2차 시험을 보지 않았는데, 쉬면 안 되겠죠?

 

  2차 시험을 보지 않은 사람은 쉴 자격도 없는 것일까? 아니다.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하다. 비록 1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셔 2차 시험을 보지 못했더라도 같은 기간에 속상한 마음을 달래 가며 공부했던 나 자신을 다독여야 한다. 그리고 원래 이 시기는 너무 더워서 공부가 잘 안 되는 계절이다. 독서실에 종일 틀어박혀있어 봐야 냉방병을 얻거나, 시원해서 낮잠만 푹 자게 된다. 게다가 2차 시험 종료 후 독서실이 텅텅 비어 버리기 때문에 공부에 집중도 잘 안 된다. 괜찮다. 잠깐 쉬자.

  


5. 휴식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휴식은 죄가 아니다.


  지금은 잘 쉬어야 된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지만, 실상 나는 휴식을 잘 취하지 못하는 편이다. 본래 슬로우 스타터라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누가 '잘 쉬는 법'을 알려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독하게 마음먹으면 쉬지 않고 달려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어리석었다. 제때 제대로 쉬지 못해 항상 번아웃된 상태로 공부했고, '어차피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잠깐 놀아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시즌 중에 괜히 벚꽃구경을 가거나, 쇼핑을 가는 등 실수를 범했다. 이렇게 시즌 중에 참지 못하고 '계획 없이' 떠나는 나들이는 휴식이 아니라 일탈에 불과했다. 죄책감이 들뿐 아니라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글은 여러분에게 휴식을 권하는 글이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전하는 글이기도 하다. 나는 의도치 않게 회사에 와서도 지난 2년간 여름휴가를 가지 못했다. 작년에는 17일 주어지는 연가 중 11일을 사용하지 못해 그대로 날려야 했다. (놀랍게도 휴가 저축도 안되고 연가보상비도 없었다. 아까워 죽겠다) 올해는 달라져야지 하는데 지금도 휴가가 12일이 남아있다. 이번에는 혼자서(ㅠ)라도 여름휴가를 떠나야지 다짐하고 있다.

  잠이 죄가 아니듯 쉬는 것도 죄가 아니다. 시즌 중에 무너지는 참사를 범하지 않으려면 프리시즌에 확실히 쉬어둬야 한다. 지금 죄책감 갖지 않고 제대로 쉬어야 봄날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도 멘탈을 다잡을 수 있다. 2차 시험 끝나고 별다른 휴식 없이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있을 텐데,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책을 덮고 쉴 계획이나 짤 것을 권한다. 지금은 책을 덮고 쉴 때다. 지금의 휴식에는 죄책감을 갖지 말자. 더 오래 뛰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나도 항공권을 더 열심히 찾아 올해는 반드시 여름휴가를 다녀오겠다고 다짐한다)   



  쏟아지는 일에 치여 허덕이고 보수적인 조직문화에 분노하다가도 행시 2차 시즌이 되면 간절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조금은 겸손을 되찾게 된다. 여러분들 또한 얼마나 큰 고생을 했을지 안다. 2차 시험에 응시한 사람뿐 아니라 1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뒤 지금까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달려왔을 모든 수험생에게 진심을 담아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