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방구리 Sep 16. 2024

고르다

터를, 털을, 짝을, 집사를, 선물을

할 일은 많고 하루 해는 어찌나 짧은지.

사람들은 우리가 주는 밥이나 먹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줄 알지만,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산다네.


가끔 글을 쓴다는 이 집 여자 집사는

[고양이와 만드는 단어사전]이라는 아이템을 정해 놓고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지.

그들의 삶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단어, 그 중에서도 동사만 추출해 내는 게 쉽겠느냐고.

먹다, 자다, 뛰다, 핥다, 그리고 싸다 정도 쓰고 나면 글감이 떨어질 것 같은데

연재물을 완성하지 못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빈곤한 건 그 여자의 상상력이지,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걸

오늘은 '고르다'라는 단어 하나로 이야기하려고 하네.


우리는 날마다 터를 고르지.

어느 집 담벼락을 넘어들어 배를 채울지,

어느 밭고랑을 파야 깔끔하게 뒤처리를 할지,

쫓아내는 발소리 걱정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다리 뻗고 쉴 자리가 어딜지,

뱃속에 들어온 새끼들은 어디에서 낳을지,

새끼들이 배부르고 등따숩게 자랄 곳은 어딜지,

온 동네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다닌다네.

이 집 여자처럼 빨리 늙기 싫다고, 다리 근육을 지켜야 한다고 운동 삼아 걷는 게 아니란 말일세.


집안에 주어진 밥상, 정해진 화장실이 있는 친구들은

집밖 묘생들처럼 터를 고르러 다니는 일이야 없겠지만,

몸을 단정히 해야 삶이 단정해진다는 우리 묘생 철학을 수호하고자 더욱 열심히 털을 고르지.

쓸 수 있는 도구라야 혓바닥뿐이라

몸을 이리 꼬고 저리 접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온몸의 털을 고른다네.

오늘은 비가 와서,

오늘은 피곤해서,

오늘은 기분이 껄쩍지근해서,

오늘은 손님이 와서 등등

오만 가지 핑계를 들어서 운동을 미루는 여자보다는 

백 배 천 배나 더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몸 관리를 한다고 자부하네.


그렇게 몸 단장을 깨끗이 해야 좋은 짝도 고를 수 있지.

아, 짝이라는 말이 반드시 짝짓기를 하는 대상을 말하지는 않아.

그야말로 파트너라네.

'깻잎군'과 '젖소양'은 이 동네 길냥이들의 복지를 위해 둘 다 거세를 당한 몸 아니던가.

게다가 그들은 모자지간도 아니고 조카와 이모 사이인데도

둘은 마치 부부처럼, 모자처럼 붙어다니지 않던가.

요즘은 짝을 바꿔가면서 두 번이나 출산한(짝을 바꿨다는 건 심증이네. 나온 새끼들의 면면이 너무 달라서 말이지.) 쓰리쓰리와도 삼총사가 되었지 않나.

더없이 다정하고 완벽한 파트너, 깻잎군과 젖소양.

그러니, 우리를 빈둥대며 사료나 축내는 건달 취급하지 말게나.

펫샵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처지가 아닌 이상,

우리에게는 집사를 고를 자유가 있으니 말이야.

성실하고 다정하게 우리를 대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떠나고 만다는 걸 부디 잊지 말게.


어때, 이 정도면 우리 삶으로 단어사전 편찬은 거뜬하지 않겠는가? 부디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연재를 잘 마무리하길 바라네.

이 책으로 상까지 타면 더 좋고! 하하하! 


추신: 인간계에서는 밝은 달이 뜨는 이맘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명절을 보낸다지?

우리도 그간 우리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준 그대들에게 추석선물을 갖다두었네.

우리로서는 제법 귀하게 고른 선물이니, 명절 상차림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네.

지구 환경 생각하여 포장은 생략하네.

요즘 도시에서 이런 귀한 물건을 고르기 어렵네. 보은의 의미로 우린 맛도 보지 않았네. 아직 따끈하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